안녕하십니까 총리 님.
글을 읽기에 앞서, 어떻게 이 편지가 총리 님에게 전달되었는지에 너무 강한 의문은 가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도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감사할 일이죠. 당사자에게 의견이 전달될지 안될지도 모르면서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이 미련한 시간 낭비 같았거든요. 그러니 총리 님께서 제 편지를 열어보셨다면 무조건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양해를 부탁드리자면 제 주위에는 스페인어를 번역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건으로는 총리 님께서 저보다 더 나은 환경이실 것 같네요. 한국과의 외교를 위해 한국어를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최소 한 명 이상 있으실 테니까요. 번역기를 사용하시든 통역사를 부르시든 원하시는 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제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저는 한국에 사는 곧 60살이 되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그리고 올봄. 4월에서 5월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 프랑스 길을 완주하고 왔습니다. 제가 스페인 총리 님과 무언가 나눌 대화 거리가 생긴 거죠.
어땠냐고요?
제 대답은 잠시 미루겠습니다. 순례길은 몇 개의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길이었거든요.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소감보다는 좀 더 진솔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힘들지만 행복하고, 고단하지만 순례길에 있는 저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날들 중에 회피하고 싶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날은 아침에 우유를 마셨습니다. 스페인에서 신선하고 고소한 우유를 마음껏 마실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순례길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마트에서 적당한 양을 사는 것도, 냉장고에 넣어 놓고 저녁과 다음날 아침에 마시는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대용량만 팔았고 냉장고는 아침에는 사용불가였죠. 하지만 그날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동료가 챙겨주었죠. 행복하게 마음껏 마셨습니다.
압니다. 예측 못한 제 불찰도 있었죠. 알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어떻게 스페인은 화장실이 없죠?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다고 자랑하는 그 길에 어떻게 당황스럽도록 화장실이 없을 수가 있죠?
처음에는 산길이어서 그런가 했습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남겨진 인간의 배설물이 스페인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크게 환경에 해롭지 않다고 여겨서 그런가 보다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좁은 산길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는 소똥, 말똥, 양똥을 보면서 순례길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고, 동물이 주인인 길도 있겠구나 받아들였고요.
질퍽하게 마르지 않은 소똥으로 뒤덮인 마을 길을 거쳐간 날은 사과하나 먹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지독한 냄새 때문에 제가 먹는 게 사과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맛도 못 느끼면서 그저 허기를 달래려고 씹었죠. 그럼에도 그 길의 배설물은 어쩔 수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작은 마을의 주민들로는 청소가 불가능해 보였으니까요. 장대비가 좀 내려야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그저 소가 주인이다 체념하고 까치발 딛고 부지런히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레온으로 향하는 평지 길은… 그건 아니죠.
어느 쪽을 보나 막힘없이 망망한 밀 밖에 안 보이는 길에서 도대체 무얼 어쩌라는 겁니까? 순례자들은 수치심도 내려놓은 줄 아시는 건 아니시죠?
제 말투가 좀 거슬려도 그냥 참고 읽으십시오. 그 평야에서 허둥댔던 저는 어땠을 것 같으세요. 뒤따라 오는 순례자가 있는지 두리번 두리번거리면서 앉았다 다급하게 일어서 옷매무새를 다듬은 저는 어땠을 거 같냐고요.
일행 중에는 양산을 가지고 다니는 이가 있었습니다. 모자에 양산에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좀 과하다 싶었죠. 하지만 양산은 비단 햇빛만 막아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릴 것이 없는 환경에서 가리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물건이었던 겁니다. 앞선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을까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면 어쩌나 하면서 우물쭈물하다가는 큰 사단이 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양산. 순례길을 간다고 하니 지인이 필수로 갖고 가야 한다고 조언했답니다.
인솔하던 대장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순례자들은 두리번거리지 않는다고. 혹 민망한 상황을 목도하면 바로 고개를 돌릴 것이니 너무 예민하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입니다. 저도 겪었습니다. 소변을 보는 외국인 남자 옆을 우리는 눈을 감고 지나쳤었습니다. 빨리빨리 걸었죠. 얼마나 다급했을까 이해는 하지만 결코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모를 뿐이지 누군가도 저의 살색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암묵적으로 안 보이는 척 못 본 척하는 거죠.
하지만 솔직히 짜증스러웠죠. 자연을 걷겠다고 왔지 우리가 자연인으로 살겠다고 온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몸의 신호에 당황스러워 갈팡질팡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래요 저도 동료들도 다 스페인의 자연에 해를 끼쳤습니다. 그리고 내내 찜찜했죠,
우리는 풍요롭게 펼쳐진 밀 밭과 콩 밭, 유채 밭을 지나며 축복받은 스페인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했었습니다. 내 나라 대한민국은 물려받은 자원이 사람밖에 없어서 나라 안에서도 나라 밖에서도 그저 치열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며 살고 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저토록 많이 받았구나. 햇빛도 바람도 비도 과하지 않고 적당히 선물로만 갖고 사는구나 싶어 질투가 났죠.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한 목소리로 분개했었습니다. 이렇듯 풍요로운 나라의 ‘순례길’이라는 특별한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가 왜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하고요.
체중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몸 상태도 그리 반갑지 만은 않았습니다. 이유가 명확했거든요. 저는 길 위에서 해결하는 횟수가 최소한이었으면 했습니다. 최소한을 위해 최소한으로 먹었습니다. 물론 우유도 더는 안 마셨고요.
황망하게 기분이 상한 날이면 경이롭던 자연도, 풍요롭던 포도 밭도 다 미웠습니다. 그런 날의 대화는 유난스럽게 강하고 공격적이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순례길에 화장실이 생기게 만들고 싶다.’ ‘만들어야겠다.’ ‘민원을 넣어보자.’ ‘한 사람당 열 번씩 열 명이 보내면 100번이니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스페인 정부가 받아들일지도 모르지 않을까.' '순례자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인의 단합력도 보여주자'며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용서의 언덕’에 상징처럼 서 있던 순례자들이 기억납니다. 순례가 생활 그 차체였던 예전부터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 길을 걸은 그분들도 분명 이렇게 바라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을 뒤따라 걸어올 순례자들은 조금 더 배려가 있는 길을 걷게 되기를 말입니다.
다음은 순례자들의 숙박 장소. 알베르게 문제입니다.
이름부터 참 이국적이면서 뭔가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기대가 컸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순례자들만의 공동 숙소라니.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나름 색다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순례길 동안 저는 총 서른 곳의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고 다시 쌌더라고요. 그 많은 알베르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뭐냐는 질문에 저는 망설임 없이 샤워 시설을 꼽았습니다.
남녀 공용 때문이냐고요? 그럴 리가요.
그 알베르게의 샤워기는 단순했습니다. 제 키의 두 배쯤 되는 곳에 붙박인 작은 샤워기에서 물이 후드득 떨어지면서 뿌연 김이 시야를 가렸습니다. 다급하게 벽을 더듬어 찾았지만 없었습니다. 냉수 온수 표식이 아예 없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작동이 안 되더라도 형식적인 구분은 있었거든요. 저는 제가 튀겨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 오후 이른 저녁 후 양치질을 하던 저는 뒤늦게 도착한 두 명의 일행이 각각 다른 샤워 부스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아 차워. 언니 어떡해요? 찬물밖에 안 나와요. 너무 차워요”
“그냥 씻어요. 물이 나오는 게 어디예요.”
그들은 내내 비명을 질렀답니다. 뜨거운 물에 튀겨진 제가 나을까요 냉수욕을 한 그들이 나을까요.
화장실과 샤워 부스가 한 공간에 있는 5인실 알베르게에서 묵은 날입니다.
가로 세로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정사각형 공간이었습니다. 한 면에 커튼이 쳐져 있는데 직원들의 요구 사항이 참 어이없었습니다. 그 공간 밖은 배수 시설이 없으니 절대 물이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답니다. 커튼을 열어 본 제가 소리쳤죠.
“여기서 씻으라고? 물 안 튀게?”
현명한 짝꿍이 설명해 주더군요.
“제가 씻으면서 실험해 봤는데요.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물을 약하게 틀고 씻으면 물이 밖으로 안 나와요”
순례자들에게 뭐 어떤 특혜가 있는 거죠?
알베르게는 순례자만 머무는 공간이라면서요. 800 km의 험난하고도 먼 이 길이 순례자들을 위한 길인 건 맞죠? 지독하게 고생하는 순례자들 입장에서 특별한 혜택은 뭐죠?
설마 이 길 위에 선 것 자체가 감사할 일은 아니길 빕니다.
비행기만 타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잖아요.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시면 할 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선택 사항이 없어서 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 무례한 판단이십니다.
지금까지 이 길을 걸은 사람들을 대변해서, 그리고 앞으로 이 길을 걷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제는 할 말을 해야겠습니다.
존경하는 총리 님
뭐라도 시도 좀 해보세요. 아니 시도 좀 해주세요.
초록 풀숲에 남겨 둔 눈 꽃 같이 하얀 휴지가 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으아. 제발이요.
절실한 바람을 담아
산티아고 순례자 배상(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