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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Jun 24. 2024

남자가 양산을 쓰면 어때서?

진짜로 '태양을 피하는 방법'

정말 양산을 쓰고 싶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점점 불어가는 살과 함께, 높아만 가는 여름날의 더위는 견디기 힘든

지경이 된 지 오래되었다. 양산만 쓰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종종 했지만 양산을 쓴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등신은 뭐야?' 

라고 생각할 것만 같아, 그런 바람은 용기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길을 걸으며 아무리 둘러봐도, 길에서 양산을 쓴 남자를 찾을 수 없었다.


ai로 만든 양산 쓴 남자. 그림은 인공티가 나도, 양산 쓴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얼마 전, 비교적 사람이 많은 곳에서 20대 남자가 양산을 쓰고 가는 아주 희귀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자기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겸연쩍어하는 표정이 확연히 드러났다. 스스로도 꽤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양산을 쓴 남자의 모습은 그다지 이상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비만 오지 않았을 뿐,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가는 모습과 다를 것 없었다.

그 남자의 모습에서 나도 양산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비도 오지 않는 날 내가 직접 양산을 펼치고 싸돌아 다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남자의 금기와 같은 양산을 드는 것은 혁명의 횃불을 드는 것처럼 비장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난 원래 겁 많고, 비겁한 놈이었다.


올여름은 지난 2018년의 그 악몽 같았던 여름을 다시 재현하려는 걸까?

6월 중순에서 조금 지났을 뿐인데, 수시로 30도를 훌쩍 넘는다.

저녁마다 고기와 술을 실컷 먹다가 살이 찐 나는 순식간에 닥친 폭염 앞에서

그야말로 기진맥진해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양산을 떠올렸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한낱 

꿈같은 상상일 뿐이었다.


반바지에 얇은 반팔셔츠, 휴대용 목선풍기를 걸었지만, 매번 집을 나서기도 전에 번번이

적잖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집을 나서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정말이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이렇게 젖는 것은 괜찮다. 에어컨을 트는 실내에

들어가면 찝찝하긴 해도 어쨌든 마르니까....

하지만, 길거리에 강력하게 쏟아지는 햇볕은 뜨거운 것은 물론, 어찌나 강렬할지

눈이 다 부실 지경이다. 그렇게 한 10분만 햇볕에 노출되면, 내 불어난 살 속에

열기는 온전히 저장되어 쉽사리 땀이 멈추지 않았다.

손수건에 얼음을 꽁꽁 묶어 목에 두르고, 그 위에 목선풍기를 걸고 트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얼음은 햇볕 앞에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었고, 불과 몇 분을

견디지 못하고 스르륵 사라지면, 나는 그 무시무시한 햇볕 앞에 대책 없이 노출되었다.


솔직히, 요즘 한낮에 내리쬐는 햇살은 저런 느낌 아닌가?


결국, 양산을 들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집을 나서는 것부터 문제가 되었다.

도저히 집 근처에서는 양산을 쓰고 다니는 내 꼬라지를  보여줄 순 없었다. 아무리 아파트에 살아서 

아는 동네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행여나 누군가 알아볼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결심을 뒤집고 싶지는 않아. 기회를 봐서 쓰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가방에 양산을 넣었다. 

약, 10분 정도 걸어서 집 근처를 벗어난 뒤, 낮이지만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을 찾아 들어간 

나는 긴장하며 주위를 몇 번이고 살폈다. 내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이 더워서인지, 긴장한 탓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난 긴장 했다. 


드디어, 양산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꺼내든 양산을 보니, 왜 그랬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어 양산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왜 어느 전직 대통령의 말이 떠 올랐을까?

"내가 이러려고 남자로 태어났나?"

뭐, 여하튼 그 순간에 느낀 자괴감은 실로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렇게 으슥한 골목에서 맑은 날 양산을 들고 주저하던 내게,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 든 양산을 들고 펼쳤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하다가

화들짝 놀라, 내 쪽을 향해 오는 무리들을 향해 마치 화살을 막기 위한 방패처럼 양산을 활짝 펼쳐

들고는 그 안으로 쏙 숨어들었다. 

그러고는, 햇볕이 내리쬐는 정확히 반대 방향을 향해 양산을 기울이며, 그 조그만 양산에 내 몸을

최대한 구겨 넣어 숨었다. 지나치는 그 무리는 얼굴을 못 보았지만, 20대 여성들 같았다.

"어머!"

"까르르"

그게 내 모습을 보고 지른 탄성과 웃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서 부끄러움은 모두 내 몫이었고,

난 더워서 아니라 창피해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렇게 여성무리를 피해 서둘러 걷다 보니, 골목길에서 벗어나 예상치 못하게 대로변에 들어섰다. 

양산을 손에 쥔 채. 이런 젠장할!

이제라도 양산을 접을까라는 생각을 잠시지만 꽤 깊게 고민했다. 

대로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다리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은 행여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양산을 쓰고 걷기로 마음먹었다. 

생각보다 양산은 얼굴을 숨기기 참 훌륭한 제품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따금 눈만 빼꼼 양산 밖으로 내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살펴보니 내게 시선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주 가끔 눈이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그냥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나치고는 말았다. 얼마 전, 양산을 쓴 20대 남자의 아주 자연스러웠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듯싶었다. 그때부터, 양산에 구겨 넣었던 180이 넘는 내 몸을

수컷 공작새가 구애할 때 날개를 활짝 펴듯이 웅크린 팔과 어깨를 펴고, 구부정했던 허리도

쭈욱 펼쳤다. 누군가 알아볼까 펜싱 경기에서 칼을 앞으로 겨누듯이 들고 걷던 난 장비가

장팔모를 어깨에 얹고 당당하게 걷듯이 양산을 어깨에 척하니 걸치고는 당당하게 걸었다.

역시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무관심했고, 심지어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도

'남자가 양산을 다 썼네' 

하는 가벼운 느낌으로 쳐다볼 뿐, 못 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자, 그제야 양산으로 햇볕을 피하기만 해도 느끼는 더위 

수준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산은 여자만 쓰는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남자들은 이젠 아열대가 된 기후에서도 노안의 지름길로 간다는 햇볕을 대책 없이 남자답게(??)

맞으면서 지 나이보다 더 늙어가고 있었던 거다. 그  사이에 여자들은 양산과 함께 남자보다

좀 더 시원한 여름을 보내면서 덜 늙어가고 있었고...

그런 생각을 하자, 양산을 들고 걷던 난 괜히 눈물이 핑 돌아 양산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래저래 양산은 참 쓸모가 많았다.


양산을 쓰고 난 뒤, 살이 쪘음에도 난 더욱 활동적인 인간이 되었다.

그전에는 여름만 되면, 어딘가를 가야 할 일이 있을 때, 미루는 일이 많았다. 그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갈 생각에 한숨만 나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볼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집을 나선다.

양산을 활짝 펼쳐 들고!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나는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저기 멀리서 친구가 내리쬐는

햇볕에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휴. 더워!"

"양산을 쓰면 훨씬 덜 더운데..."

친구가 내 손에 들린 양산을 보더니,

"너 이거 쓰고 온 거야?"

"응!"

"이 등신이 뭐 하는 거야?"

얼굴이 벌게지고 왠지 오늘따라 늙어 보이는 친구 얼굴을 보며, 속으로 난 비웃었다.

'등신은 누가 등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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