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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Jul 22. 2024

중고로 산 하드에서 회 한 접시 가격을 벌었다.

중고시세보다 엄청나게 싼 하드디스크를 사고 나서..

벌써 몇 달째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하나가 말썽이다.

말썽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수명을 다한 듯싶었지만, 새 하드디스크를 장만하려 하니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거의 반년 가까이 흘렀다. 

하드디스크는 ssd와 달리 '나 이제 죽는다.'라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전조증상을 보인다.

이렇게 고맙게 알려주는데도, 알아먹지 못하고 나처럼 차일피일 미루다 가는 어느 날

운명한 하드를 붙잡고 날려 버린 자료를 아까워하며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복구업체를 통해 살리면 되기는 한다. 

하지만, 목돈을 지출하는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기에 하드디스크에 배드섹터가 하나밖에 없네 하고 안이하게 생각하다가는 큰 일 난다. 

난 정말 중요한 자료는 늘 백업을 해두었기에, 하드디스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도 없는데,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버티자.'는 심정으로 

내 버려두었다. 하지만, 오늘은 하드에 진입조차 잘 안되어서 프로그램을 이용해 확인해 보니, 

하드디스크는 내일이라도 당장 세상을 떠나도 이상할 것 없는, 임종을 앞둔 시한부 환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드디스크는 중고로 사지도 팔지도 않는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무시하고 당근마켓을

뒤졌다. 비용과 신속성을 감안한 결정이었지만, 찜찜한 마음을 버릴 수는 없었다. 

급하기는 하지만, 나름 신중하게 나온 매물을 찾아봤다.

하드디스크의 대략적인 수명은 5년에서 10년 사이로 보는데,  중고로 나온 매물은

거의 10년이 넘은 제품이 대부분이다. 물론, 사용량이 매우 적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 때문인지 하드디스크는 다른 중고물품과 달리 새 제품에 비해 거의 5분의 1 내지, 심하면

10분의 1 정도의 가격으로 내놓는다. 

사는 입장에서는 사실상 돈을 버리고 난 뒤, 내상 입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에만 거래에 임하는 거다.


이런 악조건을 감수하고 당근마켓을 뒤져보니,  출시된 지 3년밖에 안 된 제품이 기존 제품

가격의 5분의 1 가격인 2만 5천 원에  매물이 나온 게 눈에 띄었다. 하드디스크를 매물로 내놓을 때, 

현재 하드디스크 상태를 체크한 프로그램을 캡처한 사진과 함께 올라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매물은 하드디스크 사진이 달랑 하나만 올라왔다. 매물이 올라온 지, 3일이 지났음에도 조회수도

적고, 여전히 팔리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인 듯싶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3년 동안 사용한 제품이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이 하루 종일 컴퓨터를 사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고, 하드를 채굴 그래픽카드처럼

하루 종일 무리하게 돌리며 사용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매물을 올린 글에서 사기를 치는 업자의 뉘앙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기 쳐서 팔아먹겠다고 달려드는 업자가 사진 한 장만 올리면서, 매물에 대한 설명을

달랑 '배드 없어요.' 라며 배드가 없음을 증명할 캡처 사진도 안 올렸을 리가 없다.

컴퓨터를 잘 모르는 이가 파는 것이라 짐작하고 문자를 보냈다.


역시나 자신은 사용시간과 횟수는 모르겠고, 업자가 배드가 없는 좋은 상태라고 말했다고 

한 순간, 잠시지만 심각하게 고민했다. 업자가 갑자기 왜 나와?

"업자에게 구입한 거예요?"

"그건 아니고, 하드 빼고 컴퓨터 팔 때, 업자가 그랬어요."

이게 무슨 말일까? 업자한테 컴퓨터를 팔았다고? 하드는 그럼 왜 지금 파는 거지?

뭔가 이상한 느낌은 들었지만, 사기를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의심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 그냥 거래하기로 했다.


문자지만, 어눌하게 말하는 태도에서 20대 초반의 남학생일 줄 알았는데, 40대 아저씨가

매물을 들고 나와 거래했다. 순간, 아... 업자에게 걸려들었나?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프로그램을 돌려 하드를 확인하니, 이건 뭐 정말 새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제품이었다. 새 제품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내 입장에서는 아주 아주 운이 좋아, 8만 원 돈 가까이를 아낀 셈이었다.

아무리 중고라고 해도, 제품의 상태는 아무리 적게 받아도 5만 원 이상은 받을 수 있는

상태였다. 오늘 내게 하드를 판 아저씨는 그 가치를 몰랐던 모양이다.

적어도 광어회 한 접시 가격을 날린 사실을 그 아저씨는 알고 있을까?




중고로 구입한 하드디스크를 사용한 지 며칠이 지났다. 다시 상태를 확인하니,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새 제품이 맞았다. 너무 상태가 좋아, 다시 고개가 갸우뚱 해졌다. 왜 이렇게 싸게 팔았을까?

요즘엔 당근마켓에도 업자들이 들어와 영업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 때문인지 각 제품군마다 거의 시세가 정해져 있다. 조금만 검색하면 그 시세가 얼마인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좋은 새 제품에 가까운 물건을 팔면서 시세도 안 알아봤을까? 의문이 든다.


초창기 당근마켓에는 거의 순수 개인들이 거래하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좋은 물건이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저렴한 매물이 꽤 많았다. 자기가 쓰던 물건 처분하면서, 돈을 받는 게 좀 민망하다는

마인드가 강했던 시기인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아직 꽤 있다. 내게 새 제품에 가까운 하드디스크를 판 아저씨처럼... 

너무너무 고마운 일이다.


행여나 나중에라도 아저씨가 자신이 판 하드디스크의 가치를 알고 광어회 한 접시 가격이 날아간

것을 알면, 얼마나 억울할까? 그래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

만일, 하드디스크의 가치를 알면서도 좋은 마음에 기분 좋게 싸게 판 것이라면...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기도 좋은 물건 누군가에게 싸게 넘겨준 뿌듯함을 느끼고, 사람에 따라

그 뿌듯함이 광어회 한 접시 가격을 상회해서 자신의 선의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삶을 

자신 있게 산다면 광어회 한 접시 가격의 가치와는 비교가 안 될 거다.


삭막한 세상에 운이 있어좋은 판매자를 만난 것인지, 아니면 뭘 모르시고 그랬는지...

너무 싸게 사서 기분이 좋아서일까? 생각의 여운이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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