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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Sep 15. 2024

지겨웠던 교장, 교감의 훈화와 아버지의 긴 말

긴 글은 외면받을지 몰라도 값싸게 소모되지 않는다.

40대 이상에게 '교장은 어떤 존재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거의 100퍼센트, '말 많은 인간!'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월요일마다 운동장에서 열리는 '월요조회'의 가장 핵심행사는 교장의 훈화라고 학교 측은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의 아무도 듣지 않는 교장의 훈화가 빠진 적은 없으니까.

짧게 해도 10분, 길어지면 20분, 그날따라 '오늘은 말이 잘 나오네.'

라고 교장이 착각하는 날은 30분 이상을 훌쩍 뛰어넘기도 했다.

말이 길어지는 것은 나이 든 남자의 특징이니 이해할 수 있지만, 땡볕에

아이들을 그렇게 세워놓고 길게 말을 하는 것은 무슨 심사였을까?

아이들이 더위에 지쳐 몇몇이 쓰러졌다고 교장의 훈화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쓰러진 놈이 평소에 체력관리를 잘못했던가, 정신력이 부족한 탓을 하기도 했다.

국가 대항전 축구도 정신력만 강조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교장의 훈화보다 더 끔찍했던 기억이 있다.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기념식을 전날 했다. 개교기념일은 노는 날이니까.

일 년에 한 번 있는 개교기념일 행사라고 이 날 교장의 훈화는 꽤 길었다.

5월의 햇볕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30분 이상  맞고 있으면 내리는 햇살의 열기운이

어느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몸에 축적되니 한여름의 더위를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자기가 세운 학교도 아닌데, 뭐가 저렇게 감격스러울까 싶으면서도 '뭐 어쨌든

개교기념식이고, 내일은 노는 날이니까'라고 생각하며 너그럽게 교장의 훈화를 견뎌냈다.

"다음은 교감 선생님 훈화 말씀이 있겠습니다."

교장의 말이 끝나 이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큰 충격에 빠져 술렁였다.

운동장에 서 있는 아이들 사이를 다니면서, 감독을 하던 체육선생도 교감의 훈화는 예상치 못해 역시나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표정으로 저 멀리 있는 교감을 한참 바라보다가 술렁이는 아이들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화가 난 듯,

"입 닥쳐 이 새끼들아!"

라며 아이들을 잠재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교감에게도 전하고 싶었던 중의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잡은 교감은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훈화를 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빌어먹을 한 시간이나 떠들었다.

오죽했으면, 아이들 사이를 오가던 체육선생도 짜증이 났는지, 빈정거리는 말을 농담처럼 툭 내뱉었고,

그 말에 아이들의 웃음이 터지면서 어수선한 분위기는 확산되었고, 체육도 다른 선생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아이들이나 선생이나 다들 지쳤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교감은 뚝심 있게 한 시간을 넘게 훈화를 했고, 그 덕분에 수업시간이 뒤로 밀리는 바람에

50분 수업을 40분으로 축소하는 '단축수업'이 그날 하루 종일 이루어졌다.


단축수업까지 벌어졌으니, 여기저기서 안 좋은 소리를 듣기는 한 모양인지, 그다음 해

개교기념일에는 30분도 안 되는 훈화를 해서 2학년, 3학년 전체 학생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1학년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따라서 박수를 쳤다.



아버지는 말씀이 참 많은 분이셨다.

한 번 시작하면, 두 시간은 기본이었고, 서너 시간을 훌쩍 넘길 때도 많았다. 평소에도 말씀하시는 것을

좋아하셨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유독 심했다. 그게 자식에게 교육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보통의

아버지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인내심이 적은 어린 나이에는 견디기 너무 힘들었다.


특히, 자식이 뭔가 잘못하면, 아버지는 퇴근하고 식사 뒤에, 안방에 따로 불러

일주일 내내 매일 두 시간이 넘게 훈계를 하셨다. 공장에서 육체노동을 하셨던 아버지는

나를 불러놓고 훈계를 하실 때면, 피곤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말씀하셨다. 가끔은 아버지의 표정에서 유쾌함마저 느낄 수 있었는데, 언젠가는

그날 하신 말씀이 스스로도 만족스러우셨던 걸까?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방긋 웃는 모습을 저린 다리를 두들기며

안방을 나서던 나는 아버지의 표정에서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훈계의 목적보다는 말씀하시는 것을 즐기셨다는 것을....


아마도 그때부터, 아버지의 말씀이 한없이 길어지면, 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테면, 다리가 저려서 불편하다는 듯 툭툭 치며, 자주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면, 좀 더 도발적으로

다시 자세를 바꿔 앉으면서, 저린 다리를 툭툭 가면서 속삭이듯... 하지만, 다 들리게,

"아이고 죽겠네...."

라며 노인네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쯤 되면, 아버지도

"불편하냐? 알았다.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 내가 말해주마."

라고 하시면서, 또 한 시간 이상을 말씀하셨으니, 사실상 내 도발은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혹여, 아버지께서 좋은 말씀 하시는데,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것이 괘씸해서 더 말씀을

길게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여쭤보고 싶었지만, 괜히 질문을 했다가

그 끝도 없는 말씀을 들을까 봐 감히 질문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취업을 못하고 있는 나를 늙은 아버지는 매일 불러서 자신의 기력을 총동원해

몇 시간이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아버지의 말씀이 지겨웠던 것은 그 긴 시간도 있었지만, 말씀하시기도 전에 무슨 말씀을

하실지 다 아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거의 토씨도 틀리지 않게,

"내가 고등학교 때는 말이야..."

라고 시작되면 한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다 아는 말씀을 하셨다.

다른 주제로 말씀하셔도 인용되는 레퍼토리는 항상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성인이 된 뒤에 가급적 말을 짧게 하려 노력했다.

친구들과 말을 할 때도 가급적 간단명료하게, 나보다 어린 사람에겐 훈시나 잔소리를 안 하려 했다.

그럴 때, 흔히 말은 늘어지고, 감정까지 들어가면 대책 없이 길어지기도 하니깐.

언젠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술에 취해 주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내게,

"아이, 이 새끼 술 먹여놓으니깐, 말 졸라 많네!'

그 순간 빈정대고 욕한 말은 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고, 오로지 '말 졸라 많네.'라는 말만이

내 귀에 갈고리처럼 걸렸다.

"내가 그렇게 말이 많았냐?"

술에 취해 눈은 풀리고, 혀가 꼬여서 발음이 새던 나는 갑자기 눈을 똑바로 뜨고 똑바른

발음으로 말을 해 친구들을 꽤나 놀라게 했다.


그렇게 조심하며 말을 짧게 하려 노력하며 살았지만, 역시나 유전자는 속이지 못하는 걸까?

성인이 된 뒤, 취미로 쓰기 시작한 글은 실생활과 딴판으로 주절주절 쓰다 보니 쓸데없이 긴 글을

쓰는 거다. 취미로 쓰다 보니 체계적인 글 훈련이 안 되어 있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화술을 보고 자라온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직 글에서는 조절과 생략을 할 여유가 없는 실력까지 더해져 글은 너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은 어디선가 썼던 내용을 전혀 다른 주제로 쓴 글에 그대로 쓴 것을 보면 아버지의 향기가 묘하게

나는 듯 싶어, 괜히 다리가 저려지곤 했다.




글을 오래 써 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글은 재주가 없어도 열심히 쓰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잘 팔리고, 감동을 주는 그런 글은 재능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꽤 오랜 기간 글을 쓰다 보니, 가끔은 조회수가 폭발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야말로 히트한 글은 역시나 꽤 긴 글이었다.

조회수도 꽤 많았고, 다 읽지 않으면  달 수 없는 댓글도 꽤 많이 달렸었다.

여태껏 내 글의 문제는  길어서가 아니라, 별 내용 아닌 글을 길면서도 재미없고, 지루하게

썼기 때문이라는 가끔 히트하는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난 비교적 유머감각이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요즘에도 말을 길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상대방이 재미있게 듣거나 반응이 좋으면

굳이 말을 아끼려 노력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오히려 내 유머와 궁합이 맞는 사람은 나와

대화하기를 원하고, 내가 하는 말을 즐겨 듣는 게 느껴진다.


긴 말, 긴 글을 싫어하는 시대이다. 때로는 긴 말이나 긴 글을 혐오까지 한다.

그래서일까? 긴 글은 물론이고, 영상도 긴 것은 지루하다며, 쇼츠영상이 유행이다.

하지만 짧은 영상은 대체적으로 진액만 뽑아 자극적이고 소모된다.

쓰고 버리는 제품과 같은 소모품에 감동이 있기는 힘들다.


하지만, 제대로 글과 영상은 감동을 주고, 때로는 영혼을 흔들어 인생의 길을

바꿀 정도로 영향을 준다. 소설, 영화가 그렇다. 예전에는 내가 경험했던 교장, 교감,

내 아버지 같이 뻔한 말을 길게 하는 사람도 많았고, 쓸데없이 긴 글도 많았다.

하지만, 긴 글을 혐오까지 하는 시대에 쓰인 긴 글과 긴 영상을 예전처럼 무신경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면받을 각오를 하고 쓰였다는 점에서 마냥

무시하지만 말고 가끔은 눈여겨보면 괜찮은 글이나 영상이 있다. 그런 글과 영상이

글과 영상을 소모하는 시대에 내게 뼈와 살이 된다는 진부한 조언을 하면서

이 긴 글을 마감한다.


추신: 긴 글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면서 짧게 쓰는 것은 또 아니라는

생각에 대책 없이 길게 한 번 써봤다. 행여나 이 글을 여기까지 본 사람이 있다면

인내력이 대단하다고 인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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