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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소설도, 바둑도 대신한다고?

AI가 인간의 생산적인 활동을 정말 모두 대체할까? 택도 없는 소리!

by 리버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운동회의 백미는 마지막에 펼쳐지는 계주 달리기였다.

반을 대표하는 아이들이 출발 선상에 서면, 그 산만했던 아이들도 숨죽이며 집중하다가 출발과 동시에

목이 터지게 자기 반 대표를 응원했으니, 그 작은 운동장은 그야말로 떠나갈 듯 아이들의

응원, 함성소리가 가득했고 선생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주 경기의 특성상 네 명 주자의 기량이

고르지 않기에 때로는 우리 반 대표로 나선 아이가 뒤 처지다가 역전을 당하면 망연자실하다가도,

우리 반 에이스가 모든 열세를 뒤엎으며 모든 주자를 역전할 때면, 여태껏 느껴지 못했던 희열감이 온

몸을 감싼다. 마침내, 그렇게 우승이라도 하면 경기에서 뛴 아이들과 응원을 했던 아이들 사이에 구분도

모호해지며 승리에 다 같이 기뻐한다. 역전을 당한 상대 반 아이들도 속상한 마음이 들어도 마음 속에 삭히고,

나보다 잘 뛰는 친구가 열심해 했는데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하겠니? 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해주었다.

그렇게 운동회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계주 달리기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작은 드라마를 만들고 내년을

기대하며 추억이 된다.

수 십 년 전의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던 그 경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남자 육상 100미터 10초대 기록이 처음 무너진 것은 1968년이었다. 그리고 현재 최고 기록은

2009년에 우사인 볼트가 세운 9.58초이다. 41년의 시간 동안 고작 1초도 아닌 0.42초를 단축한 거다.

그런데, 그레이하운드라는 개의 경우 100미터를 5초 만에 주파한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보다 거의 두 배나 더 빠른 셈이니 스피드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뛰는 육상경기보다 개가 뛰는

경기가 훨씬 재미있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인간이 뛰는 경기를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좋아하고 인간이

단 0.1초를 단축이라도 하면 축제 분위기에 빠질 만큼 기뻐한다.


스피드라는 가치에서보면, 개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스피드를 내는 카레이싱을 즐기는 이들도 꽤 많다.

하지만, 카레이싱은 어마어마한 속도를 제어하는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카레이서들이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은 그 운전실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만일, 카레이서가 아닌 AI가 운전하는 것이라면 카레이싱에 지금처럼 사람들이 열광할까?

아닐 거다. 사람들은 같은 인간이 어마어마한 스피드를 제어하며, 인간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에서

감명을 받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감이 더 몰입하게 만드는 거다.


바둑은 이미 AI가 사람은 도저히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AI가 인간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된 순간,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두는 바둑은 사라질 거라고

섣부르게 짐작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여러 대회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두는

바둑을 즐겨 본다. 여기에도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감이 짙게 반응한다.


소설도 AI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AI가 쓴 소설이 비교적 재미있고, 어디선가는 상도 받았다는 소문이

전해질 정도로 꽤 높은 수준까지 이른 모양이다. 소설은 글로만 만나는 것이니, 인간이 쓰던, AI가

쓰던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만일 AI가 쓴 소설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노벨상을 늘 받을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을 언제든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 작품에 인간이 쓴 것만큼

그 작품을 쓴 AI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쉽게 들지는 않을 거다.

우리는 훌륭한 작품을 만나면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세계관을 갖고

어떤 집필 의도를 갖고 새 작품을 낼 것인지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가 갖는 현실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그에 걸맞는 작품을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AI에게 그런 기대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글로만 만나니 다른 영역보다 문학은 AI에 대한 거부감이 부족해서 문학의 주류가 된다고

가정하자. 주류는 AI가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이 쓰는 소설을 읽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세계관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인간이 쓰는 문학장르는 그 생명력을 놓지 않을

거다. 같은 인간이 주는 감동은 가슴 깊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 근저에는 역시나 동질감이 작동한다.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삶, 행동, 창작, 운동 모든 행위를 인류가 생존하는 한 사랑할 것이다.

우리가 가장 절망적일 때는 언제일까?

이 세상에 혼자라는 기분이 들 때가 아니었나? 누군가 옆에 있고 그가 하는 행위를 사랑할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인간이 직접 쓰는 문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AI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이 갖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감정들을 사랑한다.

AI가 인간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인간이 절대 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에게 느끼는

동질감을 AI가 설령 흉내낼 지는 몰라도 깊은 감동까지 전해줄 수 있을까?

AI가 모든 인간 생산적인 활동을 모두 대체할 거라는 생각은 인간의 본질을 간과한 섣부른

예상일 뿐이다. 인간적인 삶과 더불어 문학, 스포츠, 예술 모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는 일은 아마도... 아마도... 없을 거다...어쩌면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우리는 관계에서 위안을 받는 존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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