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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초보지만 한 번 뿐인 우리 인생을 위해

by 리버

처음 하는 일은 서툴기 마련이다. 완벽한 가이드가 철저하게 도움을 주더라도 능숙해지기는

쉽지 않다. 내 안에 학습의 경험이 제대로 자리 잡아야 초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사가 다 그런 법인데, 우리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더 고약하게 말하면 1회용.

고쳐 쓰거나, 다시 시도하거나, 반성하고 재도전할 수 없는 1회용 성냥처럼 한 번

불을 붙이고 사그라지는...

찰나의 순간처럼 우리네 인생도 순식간에 지나가니

인생을 능숙하게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앞서 살다 간 사람들의 소중한 경험을 학습한다고 해도, 각자 처한 삶이 다르니

내 상황에 꼭 맞는 경험을 학습하기도 쉽지 않다. 때로는 타고난 환경의 운이 극악한 한계로

인해, 그런 학습의 기회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삶이란 그렇게 우연하게 다가와서 예상치

않은 모습으로 서툴게 진행되다가 짧게 끝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런 인생의 고약한 성격을 지독하고, 부당하면서 폭력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 삶의 본질이 그런 것을.


그렇게 우연히 살게 된 우리의 삶은 지극히 짧기에 인간의 삶을 오래 살았다고 삶의

본질을 알기 어렵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인생을 알아간다는 착각이 이따금 들다가

내 삶은 내가 잘 안다는 오만한 착각을 할 때도 있다.

이를 테면, 군대 훈련소 퇴소 후에 이루어지는 면회에서 아무리 깨끗하게 빨았어도 그

쾌쾌한 냄새가 가족인 면회객에게도 불쾌하게 풍기는 것을 훈련병들은 모르는 것처럼

가끔은 너무나 당연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 내 모습조차 못 보기도 한다.

작가가 캐나다에서 커피를 볶는다면서 매 번 집 안에서 연기를 가득 채워 화재경보를

일으키고는 자신만은 아니라고 착각했던 것처럼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을 본인만은 모르기도 한다.


나 자신도 이따금 제대로 못 보면서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자만감에 빠지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의 아버지는 글씨를 잘 쓰는 이가 대접받고,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글씨 쓰기를 연습시키지만, 성큼 다가온 IT시대는 아버지의 생각만큼 예쁜

글씨는 대접을 못 받는다. 또, 자식이 목욕탕에서 잃어버린 신발 때문에 화가 나서

항의를 거칠게 한 모습을 보고 깊은 실망감을 느끼게 될지는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자식은 부모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그 결과가 예상치 못한 자식의 독립적인 삶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작가의 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결과였을 거다.

“다 너희를 위한 것이었다.”

라고 거룩한 듯, 교육적인 듯 말씀하시던 부모님, 어른들의 말씀은 늘 의문스러웠다.

삶은 뜻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가끔은 자신이

의도한 것처럼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옛날 부모님, 선생님, 어른들이 ‘다 교육적으로~’

라고 말한 것이 상황에 맞지도 않는데, 교육이라는 핑계로 그냥 끼워 맞춘 말들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우연히 어느 나루터에 도착하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목적으로 정한 곳이라고 우기는 게 인간의 교만이다.

거기다가 누군가 영화 ‘기생충’에 나온 대사처럼,

“넌 계획이 있었구나?”

라고 그 오만함을 부추기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고도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오만한 삶도 우리 삶의 일부다.


이렇게 한 번의 삶을 사는 우리는 사실 초보 티가 팍팍 나는 미숙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위축되면 안 된다. 그나마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삶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작가의 어머니가 야로에 대단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은 경험에 위한 확신일 것이다.

그런 야로가 한 번쯤은 통할 수 있겠지만, 타인에 의지한 운을 믿는 삶은 늘 앞날이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 얻은 삶의 가치가 내 의지와 욕망을

온전히 투영하고 앞날을 밝혀준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온갖 시련과 고통을 이겨냈을

때, 우리는 환호하고 이야기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도

시련과 고통을 견뎌냈을 때,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가까워진다. 그러니, 한 번 주어진 삶은 대체적으로 꽤나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오징어 게임’으로 대표되는 오직 1명만이 살아남는 서바이벌 세계관으로

자신의 삶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면서 피곤하게 살 필요는 없다.

장자의 ‘무용의 용’에서 쓸모없는 나무가 오래 살고, 포커판에서는 2등이 튀지 않으면서도

실속을 차린다는 것처럼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삶의 방향, 목적, 가치를 따라가면

이 불완전한 인생을 그나마 만족하며 살 여지는 높아진다.

흔히 말하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내 자식만은 서울대를 보내겠다는 ‘서바이벌 세계관’을

버리면, 선택의 범위도 넓어지고 삶을 괜히 극단적인 피로함에 몰아넣지 않으면서도

정말 내가 원했던 만족한 삶에 더 가까워질 거다.


우리의 삶은 부모의 여러 선택과 그 뒤에 펼쳐진 여러 길에서 선택이 여러 번 반복된 끝에

선택된 삶에서 나를 만들고 나는 존재한다. 나 또한 여러 선택에서 내가 선택한 한 가지

길의 삶을 산다. 그리고, 올 때 기억을 못 했듯이, 가고 난 뒤에도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게 기억의 흔적 없이 사라질 거다. 삶을 오고 가는 동안 절망, 고통, 아쉬움 모두 우리는

기억 못 하고, 사는 동안 느낀 희로애락은 한순간의 반짝임처럼 빛난 뒤, 사그라지는

빛과 같을지 모른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죽었음을 모를 것이고, 저 우주의 다른 시공간 어디엔가는 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위안이다. “

책의 마지막 이 구절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허무함과 위안 사이를 오고 가다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백지처럼 둔다는 것은 어쩌면 미련이 없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을

막아두지도 않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우리의 삶이 어디서 오고 가는지 명백하게

말하기는 여전히 어려우니까... 그게 또 희망이라는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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