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침묵을 생각하며
2026년 2월 27일
※ 세상은 때로 거대한 연극 무대 같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정의를 외치지만 실상은 제 이익을 좇는 ‘알라존’들이 득세할 때, 우리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두신 이유를 말하고, 고대 희극은 결국 에이런의 아이러니가 승리함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남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대접받으리라”는 황금률이 어떻게 인간의 제도 속에서 스스로를 심판하는 무거운 물리 법칙이 되는지를 다룬 짧은 우화입니다.
요즘 뉴스를 듣다 보면 고대 그리스 희극에 나오는 에이런과 알라존이 생각난다. 에이런(Eiron)은 자신을 낮추고 무지한 척하며 상대의 허세를 끌어내는 지략가다. 반면 알라존(Alazon)은 제 능력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을 가진 양 허풍을 떨며 타인을 억압하는 자들이다. 에이런은 자신을 낮추며 지혜를 숨긴 채 실제로는 알라존을 굴복시키는 인물이다. 아이러니(Irony)의 어원이 되는 개념인데, 알라존의 허세는 에이런의 아이러니한 반격에 의해 무너지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나는 요즘의 여러 소식들을 들으며, 마치 그 알라존의 구조가 현대의 언어와 제도 속에서도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놀랍지만 두렵지는 않다. 출애굽기를 읽으면 바로가 끝까지 재앙을 겪고 모든 것을 잃기까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두신 것은 결국 공의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히기 때문이다.
소설을 한 번 상상해 본다. 주인공은 의로운 판사 박진우와 불의한 판사 최도현 이야기다. (가상의 인물이다.)
장면 1: 설계된 사형대
알라존들이 주도하는 의회에서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된다. 이름은 그럴듯하다. 이를테면 ‘사면 제한에 관한 특별법’, ‘의혹·소문 유포 처벌 특례’ 같은 것들이다(모두 가상의 법안이다). 알라존들은 이 법이 자신들의 영구한 방패가 될 것이라 믿으며 축배를 든다. 그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이들을 위해 만든 사형대가 얼마나 높고 견고한지 자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사형대는 타인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 규격은 정확히 설계자들 자신에게도 들어맞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장면 2: 반듯한 종이와 침묵의 재판
어느 선거 관리 현장에서, 이상한 것들이 발견된다. 예컨대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낯선 종이 묶음 같은 것들. 상식적인 시민이라면 누구나 의구심을 가질 법한 장면이다. 판사 최도현은 의회가 새로 만든 ‘유포 처벌 특례’를 근거로, 의문을 말하는 자들에게 법정 최고형에 가까운 형량을 선고한다. 그는 법전 뒤에 숨어 “나는 실정법을 따랐을 뿐”이라며 안도한다. 그는 자신이 상위 원칙(자유와 권리의 정신)과 충돌할 수 있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최도현은 판결문에 도장을 찍고 집에 돌아와도, 손끝이 한참 뜨거웠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원칙은 원칙이야.” 그리고 그 말로 양심을 다시 접어 넣었다.
장면 3: 의인의 고난과 위대한 교차
의로운 판사 박진우는 최도현과 다른 길을 걷는다. 그는 하위 법령보다 상위에 놓인 원칙—최고규범의 정신—을 근거로 의혹 제기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박진우는 판결문을 떠올릴 때마다 두려움이 올라왔지만, 그는 두려움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기도처럼 견뎠다. ‘법을 지킨다’는 말이 누군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 늦게야 정확히 알았다. 알라존들은 분노하며 박진우를 ‘법 왜곡’이라는 프레임으로 몰아 수용시설에 가둔다. (이 또한 소설적 설정이다.)
시간이 흐른다. 가나안의 아모리족속의 죄가 가득 차듯, 알라존들의 오만과 자기확신이 임계점에 도달한다. 숨겨왔던 것들이—처음에는 조각처럼—조금씩 맞물리며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치 홍해의 물벽이 무너지듯, 거대한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수용시설 정문에서 두 남자가 교차한다. 상위 원칙을 지키려다 옥고를 치른 박진우가 자유의 몸으로 걸어 나오고, 그 자리를 대신해 최도현이 들어간다.
장면 4: 황금률의 완성
최도현은 법정에서 자신이 과거에 내뱉었던 논리 그대로 심판받는다. 그는 “법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검사는 그가 상위 원칙을 무시하고 하위 규범을 휘두른 것이 바로 ‘법 왜곡’의 실체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결국 최도현은 자신이 찬성하고 집행했던 ‘구제 제한’ 때문에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힌다. 알라존들이 타인을 옥죄기 위해 만든 형벌과 구제 차단이라는 숯불은 그대로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남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대접받으리라”는 황금률은 가장 덤덤하고도 비중있는 물리 법칙이 되어 완성된다.
※ 이 이야기는 특정 현실을 지칭하지 않는 허구이며, 권력과 언어가 스스로를 심판하는 아이러니를 다룬 우화입니다. 공의와 정의가 무너지는 장면을 계속 지켜 보다 보면, 누구라도 낙담하고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인내를 나약함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하일(חַיִל, hayil)이 말하는 인내는 장식적인 덕목이 아니라 힘, 기백, 용맹에 가깝습니다. 군대와 용사를 가리킬 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일’은 단순히 “참는 사람”이 아니라, 무게를 견디는 사람을 뜻합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을 “에셋 하일(אֵשֶׁת חַיִל)”, 곧 ‘현숙한 여인=힘의 여인=강한 여인’이라 부르고, 잠언 31장 10절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조용한 충성은 무기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강력한 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박진우가 견뎌낸 침묵을 패배로 보지 않습니다. 알라존들이 쌓아 올린 가짜 법의 무게를 버티고, 마침내 그 무게가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는 ‘진실의 하일’이었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룻을 위해 기업무를 자로 자청한 보아스의 도움으로 룻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고, 공동체 안에서 존중받으며, 마침내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계보에 이름이 오르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사람의 무게를 달아 보시고, 주님의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까지 무게를 견디는 하일의 기다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회개하면서 주님의 일하심을 신실함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