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2024년 11월 15일
이번 학기에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어 주었다. 메타버스 체험관을 방문하여 체험하도록 하는 과제였다. 과제 제출은 인증숏을 찍고 느낀 점을 적어 LMS에 올리는 것이었다. 과제 점수가 성적에 많은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였다. 학생들이 메타버스 체험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다. 과제를 통한 강압적인 형태로라도 말이다. 그저께 학생들의 과제를 검사하였다. 사실 중간고사 채점 점수를 알려 달라고 해서 중간고사를 채점하고 있어야 하는데 LMS 과제를 검사하게 되었고, 학생들의 과제를 읽게 된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학기를 마치기 전에 메타버스 가상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것을 내 영어 수업 시간에 체험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여름 방학 때 메타버스 가상교실에서 수업하는 것을 알려 주는 강좌가 있었다. 관심은 많았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나는 파이썬 강좌도 듣고, 오렌지 3 강좌도 듣고, 구글 클래스룸도 운영해 보았고, 줌 수업도 하였기 때문에 한 번만 잘 배우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참석을 못해서 수업 때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중간고사 채점도 다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채점을 하고 있는데, 여름에 메타버스 강좌를 개설하신 선생님이 오셨다. 수업을 위해 프린트물을 준비하고 계셨다. 나는 선생님을 만나 기분이 아주 좋으면서도 채점도 마쳐야 해서 그냥 목례만 하고 채점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마음속에서는, '어제 메타버스 가상수업 하고 싶다고 했는데, 오늘 바로 그 수업을 하고 계신 선생님이 내 눈앞에 계셔. 그냥 이대로 목례만 하고 지나칠 수는 없어. 용기를 내 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선생님께 다가가서 사정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래도 여름 방학 때 하셨던 메타버스 강좌를 직접 듣거나 아니면 선생님이 수업 중 사용하시는 것을 청강하는 방법이 아니면 그 친절한 설명도 그림의 떡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선생님의 수업을 참관할 수 있을지 여쭈었고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데, 영어 독해 지문의 단어와 독해를 마치고 마지막에 진단평가를 할 때 메타버스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진지하게 독해 수업을 듣고 필기도 야무지게 잘하는 듯 보였다. 아무도 자는 학생도 없고 말이다. 왠지 이 수업은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신청한 학생들인 듯 보였다. 메타버스 공간에서의 진단평가는 수업 때 배운 독해 내용을 가지고 객관식 문제와 OX 문제를 풀었는데 학생들이 잘 풀었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학생들은 먼지를 제거하는 로봇청소기가 되어 먼지를 치우면서 문제를 푸는 퀘스트로 되어 있었다. 제일 많이 맞춘 학생들 3순위만 아바타 위에 숫자로 매겨져 있었다. 나는 경험상 참가하였는데도 문제 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다. 결국 내가 순위 안에 들어 있어서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과 식사를 했는데, 학생 중 한 명이 학기 초에 결석도 하고 열심히 참가하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문제를 많이 맞혀서 선생님은 감동받았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까지 맞힌 그 학생에게 계속해서 설명을 요구하였는데, 알고 보니 이해하고 문제를 푼 것인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고 하셨다. 메타버스 가상교실에 참여하는 것이 수업에 몰입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증거도 같이 확인하게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나도 도움이 될 수 없을까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내가 잘 아는 정보 하나를 선생님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서 정말 최선을 다해 알려 드렸다. 그것은 연구계획서를 가지고 지원하여 선정되면 연구비를 지원받는 것에 대한 정보였다. 이 정보를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지만, 나는 제법 많이 선정되어 진행한 경험이 있었고, 특히 전공을 넘어 융합이나 다른 분야로 연구계획서를 내었는 데 성공한 경우여서 특별했다. 자기 전공 분야에서 연구계획서를 낸 경우와는 다른 사례였다. 선생님이 관심 있는 에듀테크의 경우 융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서 더욱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의 사례를 많이 공유해 드렸다. 선생님은 감사해하셨다.
나는 영어학을 전공하였으나 연구비는 영문학과 한국문학 분야에서 지원을 많이 받았다. 최근까지도 문학 작품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연구를 하였는데 앞으로도 문학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해 선생님이 궁금해하셨다. 내가 문학 작품을 연구한 이유는 작품 자체의 주제나 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철학이나 주장을 어떤 기법과 어떤 어휘적 표현에 담아 일종의 미학적 효과를 내는지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집중하는 분야는 정확히는 문학과 어학의 중간이라고 하였다. 같은 줄거리이지만 어떤 문학적 장치와 서사 기법, 그리고 어떤 어휘에 담아내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그 메시지가 부딪칠 때 효과가 다른 것이라 말씀드렸다. 이런 것을 문체론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Stylistics이다. 우리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비문학 텍스트로 영어 독해할 때도 이 접근법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문법을 넘어서서 저자의 의도 파악이나 입장을 포착해 내는 것을 하는 데는 문학에서 사용하는 장치, 서사 기법, 화자의 인칭 등을 많이 활용할 수 있다.
나는 마침 내 가방에 있던 70페이지 남짓 되는 나의 자서전을 보여 드리게 되었다. 그 자서전에는 내가 원래 문학소녀였는데 화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에 다시 영문학과에 가서 공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제 막 나온 책인데, 인쇄만 한 상태이다. 출판사에 문을 두드려 볼 예정이다. 나의 자서전에는 사람이야기보다 학문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내가 공부한 과정이나 관계된 과학 지식, 그리고 수학자, 과학자, 언어학자, 그리고 문학가와 그들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70페이지 정도 시집 정도 되는 크기의 책을 펼치면서 내가 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는지 보여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책의 에필로그와 작가 소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작가 소개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 문학 속 부조리와 모순이 불편했던 작가는, 과학적 진리로 세상의 복잡함을 해석하고자 했으나, 논리와 수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깊이를 깨달으며 문학과 신앙의 길로 돌아왔다. 이제 하나님을 위대한 스토리텔러로 이해하게 된 작가는,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이야기 속 일부로 바라볼 수 있도록 그 깨달음을 전하고자 한다."
선생님은 이것을 읽어 보셨다. 끄덕끄덕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에게 "제가 어떻게 영국의 대학에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을까요?"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궁금하다고 했다. 여기서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내가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자, 마치 하나님이 선물처럼 영국 유학을 보내주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누구나 영미권에서 유학하기를 로망 하니까 선물이 맞기는 맞다. 내가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달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나는 30대 중반에 다시 시작한 영어영문학 석사과정 중 세부전공으로 영어학을 선택하였다. 두 번째 학기부터 형식 의미론 수업을 들었는데, 프레게와 러셀과 같은 논리실증주의의 시초가 되는 학자들에 대해 배웠다. 이 관심이 이어져서 나중에 괴델에 대한 책과 자료를 읽게 되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적 명제와 입증에 관한 내용인데, 우리 일상에서 해당되는 예를 찾자면, 대학 바깥에 나와야만, 바깥에서 대학 내부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불완정성 정리에 해당한다. 또 다른 예로는 (물론 학문적인 접근은 아닐 수 있지만), 인간끼리만 있다면 인간의 구원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인간이 아닌 외부의 구원자가 와야지 인간에게 닥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적용하는 해석이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셔야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공부하고 나서 영어영문학과 문학 수업을 통해 접한 많은 소설과 당시 개봉한 영화를 보면서 이것을 인간의 세계에 접목해 보기 시작하였다. 그랬더니, 문학과 영화에서 외부 구원자 플롯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아바타> 영화가 유명했는데, 주인공이 다른 행성의 나비족을 구원하는 이야기였다. 외부 행성에서 온 슈퍼맨이 인간을 돕고 구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때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외부 구원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성경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면서 성경의 말씀이 오롯이 사실로 믿어졌고, 예수님의 부활도 믿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나에게 영어 과외자리가 우연히 주어졌고, 그분은 로터리 회장님이셨다. 나에게는 로터리 장학생으로 영국 유학의 길이 열렸고, 영국에서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신 한인교회분들 덕분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되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기독교도가 되었다.
영어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지만, 연구비 지원을 받는 연구가 문학이어서 문학 공부를 추가로 해서 논문을 써야 했다. 그래서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였다. 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왜 내가 문학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 자서전을 쓰면서 나는 문학, 특히 내러티브 장르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을 선생님에게 내 자서전의 에필로그를 보여 주면서 말씀드렸다. 10여 년 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알게 되었다면, 올해는 자서전 글쓰기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과 구약(내러티브)과 신약(예수님이 메시아이심에 대한 논증과 서신)의 글쓰기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문학과 논증적 글쓰기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보완하는 관계임을 성경 통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것은 에필로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문학을 공부하며, 소설의 구조와 작법을 배울 때, 나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위대한 소설 속 사건들은 결코 무작위로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인물의 행동과 대사는 정교하게 맞물려 있으며, 이야기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계획하시고, 우리가 그 계획을 인지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의 이야기를 쓰고 계신다. (중략) 때로는 삶이 혼란스럽고 부조리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완벽하게 맞물리고 있음을 믿는다. 마치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복선들이 이해되듯이, 우리 인생의 종착점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완전한 결말을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승리한 축구 경기를 재방송으로 보는 것처럼, 비록 오늘은 폭풍 속에 있을지라도 위대한 작가이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승리로 이끌 것을 믿는다."
나는 지금 이 글을 남기고 싶어서 여기서 바로 급하게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어제 그 선생님을 만난 것이 우연히 아니라는 것을 증거로 남기고 싶어서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 날에 학생들의 과제를 읽으면서, '아, 나도 메타버스 가상교실에서 수업하는 기회를 학생들에게 마련해 주고 싶다. 그런데 잘 알지 못해서 참 답답하고 안타깝다'라고 생각하고 고민했던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께 이 글을 통해 감사드린다. 그 선생님께 나는 연구계획서 작성법이나 내가 받은 심사평 등을 공유해 드렸다. 선생님도 나도 평소 같으면 프린트하러 그 장소에 가지 않는데 우연히(?) 같은 공간에 있었고 그렇게 해서 나와 선생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도 나누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는 나는 평소에는 그 자서전 책자를 가지고 가지 않는데 어제는 가지고 있었고 또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불과 몇 주 전 자서전을 마무리하면서 그제서야 주님이 왜 나로 하여금 문학을 공부하게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위대한 스토리텔러이신 주님의 일하심을 알게 해 주셨고, 룻기에 자주 나오는 '우연히'는 문자 그대로의 우연히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셨다. 그래서, 어제의 만남과 대화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끝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하신 것도 필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나는 다듬지 않은 이대로 여기에 글을 남긴다. 나중에 우리 두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더 진행되고 난 뒤에, 어제의 만남이 주님이 깔아 놓으신 복선이었음을 여기 성지순례하듯 와서 확인할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