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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첫 약혼녀

3. 열한 번째 여자

by 아리미 이정환

정화와 사귀기 전, 내 인생에 뜻밖의 여자가 나타났다.
영석이 여친의 사촌언니, 이은정.

사실 나는 그녀의 사촌동생에게 관심이 있었다. 문제는 그 애가 영석이 여친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거다. 그 얘길 들은 영석이가, 뭐가 재미있었는지, 다음 모임에 은정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야, 네가 마음에 들면 사촌언니도 괜찮잖아.”
그 식이었다.

첫인상부터 썩 마음은 안 갔다. 누나처럼 굴고, 미묘하게 튀는 구석도 있었다.
두 번인가 더 만나고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먼저 그만 보자고 했다.

하지만 은정이는 예상 밖이었다.
내가 디제이를 보던 둥지다방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 조용히 앉아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싹 웃어주고, 말 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끈질긴 여자였다.
어쩌면 조금 무서웠다.

그러다 내가 정화와 사귀기 시작했고, 그걸 본 은정이는 슬쩍 물러났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연이란 게, 참 사람을 갖고 논다.
정화와 모종의 사건으로 헤어진 뒤, 어디서 들었는지 은정이의 구애가 다시 시작됐다.
그녀는 또다시 둥지다방에 나타났고, 나는 마지못해 몇 번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고연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신촌에서 연대 친구들과 미친 듯이 놀다가, 마지막까지 남은 은정이와 택시를 잡아타는데…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네온사인을 보다가, 우리는 어느새 미아리 여관촌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날 밤이 우리 사이의 경계선을 넘겨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은정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진 않았다.
군 입대 전, 마음이 흔들리던 시절… 그냥 섹스 파트너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었다.

군에 간 뒤,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휴가를 나와도 내가 먼저 찾지 않았다.
그렇게 흐지부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제대 말쯤, 동생이 면회를 왔다.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오는데…
나는 눈을 의심했다.
은정이가 동생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그날따라 묘하게 다르게 보였다.

외박을 나와 동생을 먼저 보내고, 은정이와 전곡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했고, 외모는 어느 순간 ‘완성형’이 돼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 이 여자랑 진짜 인연이 있으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대 전 마지막 휴가에 우리는 서울 근교로 여행을 갔다.
며칠을 붙어 다니며 지내다 그녀의 집에 들렀고, 나는 처음으로 결혼을 입에 올렸다.
그녀의 부모님은 의외로 흔쾌히 허락했다.
우리 집에서도 반대는 없었다.
특히 할머니가 은정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이제는 모든 게 순탄하게 굴러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복학을 포기하고, 다시 입시 준비를 하며 시각디자인과로 방향을 틀면서 문제가 생겼다.
예비 장인은 결혼이 미뤄지는 걸 불안하게 여겼고, 그 불안이 결국 우리 사이의 틈이 됐다.

나는 83학번에서 89학번이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관계는 다시 무겁게 흔들렸다.

1989년, 대학 1학년 여름방학.
그해 여름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가파르게 꺾였던 계단처럼 기억된다.

그리고 첫 중절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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