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적응계로서의 의식에 대하여
지난날 내 인생의 모토는 단 한마디였다.
“해낸다.”
샤워기 물줄기를 맞으며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난 해낼 수 있다. 반드시 해낸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해낸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쥐어짠다”와 비슷했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나라는 엔진의 가속 페달을 바닥까지 밟아댔다. 더 밟으면 더 나간다고 믿었다. 더 밟으면 더 빨리 가고, 더 빨리 가면 더 빨리 도착할 거라고.
그때의 나는 나를 기계로 보고 있었다.
기계는 선형적이다. 입력한 만큼 출력된다.
가속 페달을 세게 밟으면 더 빨리 나가는 자동차처럼, 나도 더 노력하고 더 몰아붙이면 더 큰 성과가 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복잡적응계(Complex Adaptive System)다.
밟으면 밟을수록 빨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과부하가 걸려 멈춰 서기도 한다. 어떤 날은 컨디션이 좋아서 같은 일을 두 시간 만에 끝내고, 어떤 날은 한 줄도 못 쓴다. 달리기도 똑같다. 어제는 가볍던 속도가 오늘은 숨이 턱 막힌다. 선형이 아니다. 주기가 있고, 역치가 있고, 회복이 있고, 붕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기계가 아니라 생태계다.
여기서 “창발성(Emergence)”을 빼놓을 수 없다.
창발성이란 하위 구성 요소에는 없던 특성이 전체 구조에서 불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이다. 우리의 의식이 그렇다. 뉴런 하나에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수십억 개가 얽히면, 어느 순간 ‘생각’이 나타난다.
몇 년 전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란 그저 뉴런의 전기 신호일 뿐이잖아.”
처음엔 그럴듯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틀린 말이었다. 전기 신호는 재료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신호들이 빚어낸 ‘생각’이라는 교향곡은 전기 신호 그 이상이다. 환원주의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부분을 쪼갠다고 전체가 보이는 게 아니다.
이걸 인정하는 순간, 내 삶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이전엔 “내가 왜 이러지?”가 수치심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원래 비선형이구나”가 설명이 됐다.
나는 오랫동안 ‘나’라는 존재가 고정된 단일 자아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단일한 자아를 더 단단하게, 더 강하게, 더 일관되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현실에서 계속 논박당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듯, 인간은 본래 일관적이지 않다. 20대의 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애썼지만, 상황이 바뀌면 답도 바뀌었다. 최근 유행한 MBTI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그 결과에서 ‘본질’을 찾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경험과 환경이 만들어낸 ‘현재의 경향’에 가깝다. 바뀐다. 변한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일관성을 강요한다.
입장을 바꾸면 변덕이라 하고, 애매하면 우유부단이라 하고, 확신을 미덕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반대로 생각한다.
모순을 견디는 힘이 지성이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품고도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은 양가적이 아니라, 때로는 삼가적이고 사가적이다. 이게 고장이 아니라, 생태계의 정상 작동이다.
그래서 나는 자아를 이렇게 다시 정의했다.
자아는 ‘추측의 생태계’다.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추측(가설)들이 산다.
“이렇게 하면 인정받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안전하다.”
“이렇게 해야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해야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추측들은 현실과 부딪히며 생존투쟁을 한다.
맞는 추측은 살아남고, 틀린 추측은 무너진다.
문제는 딱 하나다.
논박당한 추측을 붙잡고 있을 때, 내 마음이 아프고 화가난다.
나는 이걸 육아를 하며 자주 생각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까꿍 놀이’를 보자.
부모가 얼굴을 가렸다가 나타나면 아이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 놀이가 단순히 귀여운 놀이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는 그 놀이를 통해 아주 중요한 데이터를 얻는다.
“사라져도 다시 돌아온다.”
그 데이터가 쌓이면 아이는 기존의 불안한 추측을 폐기한다.
“눈앞에 있어야 안전하다”를 버리고,
“잠시 떨어져도 안전하다”라는 더 강건한 추측을 만든다.
그게 안정 애착이다.
그러니까 성장이라는 건, 본질을 찾는 게 아니라
가설을 교체하는 과정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내 삶의 많은 장면이 다시 보인다.
예전엔 화가 나면 “내가 인내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석한다.
화가 난다는 것은, 내가 가진 추측이 현실과 충돌했다는 신호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하려 한다.
나는 내 권한 밖의 것을 원한다.
그리고 그 욕망이 꺾일 때 분노가 올라온다.
이때 필요한 건 “참는 기술”이 아니다.
필요한 건 추측을 고치는 기술이다.
내 일기에 자주 적었던 문장이 있다.
“내 마음은 아직 논박되지 않은 수많은 추측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많은 추측을 붙잡고 있고, 그 중 일부는 앞으로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성장은 내가 가장 아끼던 추측이 논박될 때 일어난다.
생태계 관점에서 중요한 건 ‘최적화’가 아니다.
다양성이다.
생태계 내 특정 종이 전체를 독점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공룡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멸종했을 때, 작은 몸집으로 다양성을 유지하던 포유류는 살아남았다. 우리 내면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속에는 아끼는 소나무 숲도 있고, 없애버리고 싶은 모기떼 같은 생각도 있다. 그런데 모기떼를 억지로 잡으려 든다고 박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집착이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모기를 잡는 게 아니라, 숲을 가꾸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독서를 한다.
독서는 내 마음의 숲에 새 종을 이식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건, 내 생각과 너무 비슷해서 읽는 내내 고개만 끄덕이게 되는 글만 고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전혀 이해가 안 되고, 불편하고, 낯설어서 ‘이게 무슨 말이지?’ 싶은 글에 일부러 도전해야 한다. 그래야 내 생태계에 내가 원래 갖고 있지 않던 종들이 들어오고, 내 추측들이 과점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새 종이 정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내가 요즘 세운 모토가 나온다.
예전의 모토가 “해낸다”였다면, 이제는 “기다린다”다.
기다린다는 건 무기력함이 아니다.
생태계가 스스로 회복하고 재구성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건을 만들고, 나머지는 창발을 기다리는 일이다.
생태계에는 산불도 난다.
내가 아끼던 소나무 숲이 홀라당 타버리는 사건이 온다. 그때 인간은 소유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내가 망했다.” “끝났다.” 하지만 생태계 관점은 다르다.
산불은 고통스럽다. 그런데 산불은 동시에 기회다.
울창한 그늘에 가려 자라지 못했던 새로운 생명들이 싹틀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생태계는 회복한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반대로, 생태계를 너무 급격히 불태우면 회복 불가능한 붕괴가 온다.
그래서 나는 히스 레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조커를 연기하기 위해 기존 자아의 생태계를 인위적으로 불태워 사막으로 만들었다. 완전히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연기가 끝난 뒤 복구할 시간이 부족했다. 생태계는 ‘변화’에 강하지만, ‘급격한 파괴’에는 약하다.
이데올로기도 비슷하다.
하나의 사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숲을 밀어버리고 단 하나의 작물만 심는 단일 경작과 같다. 다양성을 말살하고, 반증을 거부하고, 결국 멸절한다.
이제 나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기계적 단일 자아라는 낡은 추측을 폐기했다.
대신 ‘추측의 생태계로서의 자아’라는 깃발을 꽂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나를 몰아붙여 성과를 “쥐어짜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숲을 유지하는 일이다.
어쨌든 결론은 이거다.
나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생태계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나를 고치기보다, 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