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술과 지적 허영심에 대하여
대화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는 욕심에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뒤집어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을. 그래서 나는 전략을 수정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내가 택한 방식은 단순하다.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보는 것이다. 마치 아이와 소꿉놀이를 할 때, 아이가 건네는 엉뚱한 설정에 맞춰 장단을 맞춰주는 과정과 흡사하다.
문제는 이 과정이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점이다. 아이와의 놀이가 금방 지치고 지겨워지는 것처럼, 타인의 세계에 온전히 맞춰주는 일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곤 한다. 그럼에도 상황을 내가 통제하려 드는 순간 피곤함은 배가 된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흐름을 유도하지 않고, 그저 물 흐르듯 '맞춰준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그럴싸한 전략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진다. 범인은 다름 아닌 나의 '허영심'이다.
얼마 전, 지인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그랬다. 처음에는 다짐한 대로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잘 맞춰주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피로가 쌓이자 방어 기제가 풀려버렸다. 상대방의 대화 주제가 나의 관심사와 아주 조금이라도 겹치는 순간, 억눌려 있던 댐이 터지듯 나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최근 읽은 책, 썼던 글, 고민했던 철학적 주제들이 막힘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신나서 떠들었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익숙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왜 나는 멈추지 못했을까?"
유명한 프로게이머의 플레이를 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그들이 아마추어와 다른 점은 난전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자원을 관리하고 건물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건 의식적인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수만 번의 반복을 통해 몸에 새겨진 '무의식의 영역'이다. 아마추어는 생각하느라 타이밍을 놓치지만, 프로는 몸이 먼저 반응하여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잘 들어줘야지"라는 머리 속의 계산만으로는 실전의 난전을 이겨낼 수 없다. 실질적인 지혜는 머리가 아닌 몸에 익어야 한다. 나에게 부족한 건 바로 이 '대화의 근육'이었다.
대화를 많이 해보면 늘까? 수학 문제를 무작정 많이 푼다고 실력이 늘지 않듯, 대화도 나의 사고 과정을 복기하고 오류를 찾아내지 않으면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나는 일기를 통해 나의 대화 패턴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타인을 분류하는 오만한 기준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있었다. '나와 지적으로 비슷한 사람' 혹은 '그렇지 못한 사람'. 나보다 뛰어나다고 느끼는 사람 앞에서는 얼어버리고,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 앞에서는 기어이 '한 수 가르쳐주려는' 충동을 느낀다. 이 충동은 도파민을 자극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다는 나의 저열한 소망을 충족시킨다.
차라리 깐깐한 철학자의 자아를 지우고, 약간은 속물적인 모습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편할 때도 있다. 어설프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조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미궁에 빠지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까지 당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설명을 구체화하려 들면 곧 밑천이 드러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려는 그 충동은, 역설적으로 "나는 아직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정할 때 비로소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말을 줄이는 법, 아니 '침묵의 기술'은 결국 나의 무지를 깨닫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오늘부터 나는 대화의 자리에서 입을 여는 대신, 나의 무지를 관찰하는 연습을 다시 시작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