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의미와 스몰토크의 어려움
나의 사랑하는 두 딸들에게.
오늘은 2026년 2월 22일 일요일이다. 어제에 이어 꽤 따뜻했지만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었지. 우리는 일요일을 맞아 교회로 향했어. 슬이는 유치부를 무척 좋아해서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가서 예배를 드리고, 진이는 영아부에서 아빠 엄마와 같이 예배를 드린단다.
특히 진이는 영아부에서 찬양에 맞춰 율동하는 걸 너무 좋아해. 자리에 앉자마자 외투도 벗기 전에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걸, 겨우 붙잡아 외투만 훌렁 벗겨주면 곧장 달려 나가 신나게 춤을 추곤 하지.
영아부 예배가 끝나면 '공과공부'라고 해서 다 같이 둥글게 둘러앉아 스티커 붙이기 같은 활동을 해. 오늘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는 준이네 부모님도 함께 계셨어. 준이는 진이보다 5개월 먼저 태어난 오빠인데,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야. 반면에 진이는 또래보다 월등히 커서 오히려 진이가 준이보다 반 뼘 정도는 더 크단다.
진이는 하도 발발대며 돌아다녀서 여기저기 안 건드리는 데가 없어. 가끔 준이 주변을 휙 지나가면서 준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하나씩 툭 건드리곤 하는데, 준이는 자기 장난감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서 그런 행동에 크게 화를 내며 울곤 했지. 진이는 어차피 한곳에 몇 초 이상 머물질 않으니 쿨하게 떠나버리는데, 남겨진 준이는 서럽게 우는… 그런 상황이 몇 번 있었단다.
오늘 테이블에 둘러 앉아있자니 약간 어색해서, 아빠가 준이네에게 먼저 말을 건넸어. "준이는 요새 뭐 좋아해요?" 준이 부모님은 이것저것 다양한 걸 좋아한다고, 특별히 푹 빠져있는 건 없고 관심사가 자꾸 바뀐다고 대답하셨지. 아빠도 우리 진이도 그렇다고, 뭔가 계속 바뀐다고 맞장구를 쳤어.
거기까진 참 좋았단다. 그런데 이어서 준이네가 고민을 꺼내놓으셨어. 요새 준이가 장난감을 뺏기기 싫어해서 어린이집에서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말이야.
돌이켜보면 이 타이밍에서, "아이고, 진이가 자꾸 장난감을 건드려서 난처한 상황을 많이 만든 것 같네요. 미안합니다." 하고 부드럽게 넘겼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빠는 다소 뚝딱거리면서 "크면서 다 나아질 거예요."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대답하고 말았단다.
집에 돌아와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았어. 아빠는 왜 그 대화에서 그렇게 뚝딱거렸을까. 그리고 왜 대화가 끝난 후에도 이토록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었을까.
곰곰이 내면을 들여다보니, 평소 아빠의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던 선하지 않은 생각의 습관 때문인 것 같았어. 속으로 은연중에 '준이가 발달이 조금 느린 건가. 그에 비하면 우리 진이는 참 잘 자라고 있네' 하며 알게 모르게 얄팍한 우월감이나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었으나 말로 표현조차 하지 않았던 그 미세하고 부끄러운 마음들이, 엉성한 대화 속에서 행여나 상대방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던게 아닐까. 만약 아빠가 평소에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두었다면 어땠을까. 준이를 정말 내 자식처럼 귀하게 여기고, 그 아이가 씩씩하게 잘 자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뿐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어설픈 실수를 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조차 없지 않았을까.
예전부터 아빠는 교회에서 흔히 하는 "기도해 줄게"라는 말을 꽤 회의적으로 생각했었단다. 실제로 기도하지도 않을뿐더러,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현실적으로 해결될까 하는 의구심이 컸거든.
그런데 오늘 문득, 근본적으로 이 '기도'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마음을 닦아내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상대방의 고민과 걱정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품는 것. 그 과정을 통해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헛된 우월감이나 시기심 같은 감정들을 기꺼이 닦아내려하는 것.
물론 인간이기에 그런 옹졸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최대한 닦아내려 애쓰는 과정이 바로 기도가 아닐까.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결국은 '나의 영혼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빠는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 가는 듯해.
어떤 단어의 이면에는 '비교'의 잣대가 숨어 있단다. 상대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대개 그렇지. 아이를 키울 때 흔히 쓰는 '발달'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야. 누구는 상대적으로 빠르고, 누구는 느리고, 또 누구는 비슷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까. 이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더 나은 입장에, 누군가는 덜한 입장에 설 수밖에 없지.
과거에는 한 가정에 자식이 여럿이었으니,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 시대의 부모들은 오직 한 아이만 뚫어져라 바라본단다. 객관적으로 내 자식을 판단할 비교군(레퍼런스) 자체가 부족해. 아빠도 자식을 여럿 낳아본 건 아니지만, 사람의 성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기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고, 특히 어릴 때일수록 그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는 아이의 발달이 온전히 부모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 물론 부모의 노력이 도움은 되겠지만, 아빠 생각에 그것이 아이의 근본적인 궤적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진 못하는 것 같아. 그저 아이가 타고난 대로 자라나는 것을 방해만 안 해도 다행인 거지.
그러니 아이의 발달이 느리든 빠르든, 체구가 작든 크든 간에, 과거처럼 자식이 많았던 부모라면 "쟤는 좀 빠르고, 쟤는 좀 느리네" 하며 객관적으로 넘길 수 있었을 거야. 대화 중에 크게 속상할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오직 하나의 세상인 소중한 내 자식을 다른 아이와 비교해야만 하는 요즘 부모들에게는, 특히 발달이 조금 늦거나 체구가 작은 아이의 부모에게는 이런 류의 대화가 큰 상처로 다가올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아빠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비교가 될 만한 주제는 애초에 최대한 피하자.' 적어도 아이들의 발달과 관련된 이야기는 가급적 꺼내지 않는 게 좋겠어. 주말에 어디 놀러 갔다 왔는지 같은, 가볍고 즐거운 경험에 관한 이야기나 나누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참 잘 모르겠다. 대화라는 건 참으로 어려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스몰토크조차도 아빠에겐 때때로 참 벅차고 힘들게 느껴진단다.
사랑을 담아,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