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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메루 Mar 07. 2023

사도세자와 정조

융·건릉 답사기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10월의 마지막 날 수필반 문우들과 함께 화성 융건릉에 답사를 갔다.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정조의 아버지와 정조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입구에서 기다리면서 전체 조감도를 보니 아늑한 산속에 오른쪽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가 왼쪽에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 씨의 능이 나란히 잘 모셔져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부부가 이렇게 하나의 공간에 묻혀 있는 것이 참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먼저 정조의 능인 건릉으로 향했다. 학생들 단체가 모두 융릉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좀 더 여유 있게 둘러보기 위해서 건릉을 먼저 보기로 한 것이다.



건릉은 융릉 서쪽으로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을 이룩한,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가 합장된 능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운명을 가슴 아파하며 죽어서도 아버지 근처에 묻히고 싶어 했던 정조의 유언이 이루어져 아버지 곁에 묻힌 것이다. 애당초 건릉은 융릉 동쪽 언덕에 모셔졌는데 그 자리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설이 자주 거론되어서 길지를 물색하던 중 순조 21년(1821)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여기로 이장하면서 합장했다고 한다.


소나무 향이 상쾌한 안개가 살짝 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자그마한 금천교를 지나 전방에 시원스레 묘역이 보였다. 홍살문과 정자각, 능선이 차례로 올려다보였다.

오른쪽에 비석을 모신 누각이 보였다. 정조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순조가 즉위하면서 묘호를 정종(正宗)으로 했다가, 광무 3년(1899) 정조(正祖)로,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했다고 한다.


수필반 선생님 덕분에 능위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올라가니 사이렌이 요란스럽게 울려댄다. 주저하다가 괜찮다고 해서 다시 찬찬히 능을 살펴보았다. 건릉의 봉분은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난간 석주에 문자로 십이지를 표시했는데, 방향 안내를 위한 것이다. 합장릉인데 상석은 하나를 놓았고, 팔각장명등은 둥근 향로와 같은 기단부 위로 잘록한 허리에 안상이, 상석에는 면마다 둥근 원을 그리고 매·난·국을 새겨 넣었다. 문·무인석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여느 왕릉과 같이 상석과 석마 2쌍, 망주석 1쌍, 수라청, 망료위, 표석 등과 봉분 뒤로 3면에 곡장이 둘러쳐져 있다.


학창 시절 이후 처음으로 왕릉에 답사를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번 기회에 왕릉의 기본 구조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거 같아 정리를 해보았다.




조선왕릉의 구조는 크게 재실과 진입 공간, 제향 공간, 전이 공간, 능침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재실(齋室)은 능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건물로 제사기구를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숙식제공과 제사에 쓰는 음식을 장만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진입 공간에는 금천교와 홍살문, 배위가 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금천교(禁川橋)는 속세와 신성한 공간(왕릉)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다리다. 금천교 앞에 있는 홍살문(紅箭門)은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 문으로,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는데, 그 중앙에는 삼태극 문양이 있다. 능·원·묘·궁전 앞에 세웠는데, 해당 장소의 신성함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왕릉 입구뿐만 아니라 왕릉군의 입구에도 홍살문을 세워놓는다. 홍살문 바로 옆에는 배위(拜位)가 있는데, 한 평 정도 되는 공간에 돌을 깔아 놓았다. 여기서 왕이 절을 하는데, 판 위 또는 어배석, 망릉 위라고도 한다.


제향 공간에는 정자각과 참도, 수라간, 수복방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길인 참도(參道)는 혼령이 다니는 신도와 임금이 다니는 어도로 나뉜다. 참도는 대게 정자각 앞까지 가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정자각의 측면으로 연결된다. 참도 양 쪽 옆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수라간(水刺間)과 능참봉(왕릉 관리직)이 거처하는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정자각(丁字閣)은 정(丁) 자 모양의 건물로 제례 시 정자각 내부에 있는 제구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조선왕릉에서는 필수적인 건축물이다. 정자각 내부에는 제사를 지내는데 쓰이는 제구(祭具)가 있다.


전이 공간에는 왕릉의 주인을 설명하는 비석이 있는 비각(碑閣)이 있고 축문(祝文)을 태우는 예감(소전대 또는 망료위)과 능이 위치한 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신석이 있다.


능침 공간 구조는 성역공간이라고도 하며, 경사면이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대석(長臺石)에 의해 능침 공간은 하계, 중계, 상계로 나뉘는데, 하계에는 봉분을 지키는 무인석과 석마 한 쌍이 있고, 중계에는 능 주인의 명을 받드는 문인석과 석마 한 쌍,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상계에는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혼이 쉬는 공간인 혼유석(魂遊石)이 봉분 앞에 있고, 봉분의 양 쪽에는 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있다. 망주석은 혼령이 봉분을 찾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봉분 주위로는 석호와 석양이 봉분을 둘러싸 능침 공간의 밖을 지켜보는 형상으로 봉분을 보호하고 있다. 석양은 악귀를 제거하고, 석호는 산천의 맹수로부터 봉분을 수호하는 역할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문무인석의 옆에 있는 석마는 희생수(犧牲獸)로 영혼의 운송자로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봉분 밑부분을 둘러싼 병풍석(屛風石)에는 12개의 방위를 담당하는 12 지신상을 해당 방위에 양각하였는데, 봉분을 침범하는 부정과 잡귀를 쫓아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병풍석과 함께 난간석(欄干石)이 봉분을 둘러싸는데 후기의 조선왕릉에는 난간석만이 봉분을 둘러싸는 양식으로 변모하였다. 3면의 담장으로 능침 공간을 둘러싼 곡장(曲牆)은 조선왕릉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능침 공간의 동, 서, 북의 삼면을 둘러싸 봉분을 보호한다고 한다.


해설사분과 11시에 약속을 한 것을 깜박하고 느긋하게 융릉으로 향했다. 융릉으로 가는 산책로도 아주 잘 조성되어 있었다. 잔디가 모두 깔려 있어 폭신했고 군데군데 토끼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시냇물도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고 아늑했다.


융릉은 후에 장조(莊祖)로 추존된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인 경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장조가 죽은 뒤 아버지인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린 시호가 사도세자이다. 융릉은 본래 동대문 밖 배봉산에 있었는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1789년에 현재의 위치인 화성시 화산으로 이장했다.


보통 합장릉은 상석을 두 개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융릉은 합장릉이면서도 혼유석은 하나이다.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하였다.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상계에는 능침, 혼유석,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다웠다.


융릉의 특이한 점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 다른 능과 다르다는 것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위치하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아마도 뒤주에서 깝깝하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라도 앞이 훤히 탁 트이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는 풍수의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고도 한다.


비각에는 두 개의 비가 서 있다. '조선국사도장헌세자현릉원'(朝鮮國思悼蔣獻世子顯隆園)과 '대한장조의황제융릉헌경의황후부좌'(大韓蔣祖懿皇帝隆陵獻敬懿皇后附左)라 쓰인 비이다. 능의 주인이 여러 번 추존을 거쳤으며 합장릉임을 알 수 있다.


정자각을 지나 왼쪽으로 올라가면 화려한 병풍석과 꽃봉오리 인석(引石)을 두른 봉분이 눈길을 끈다. 찬찬히 살펴보면 석물 하나하나에 깃들인 정성이 예사롭지 않다. 난간석은 없으나 병풍석엔 목단과 연화문을 번갈아 새겼고, 인석에는 탐스런 잎받침 위에 꽃봉오리가 사방으로 둘려 있다. 이 꽃봉오리에 방향을 표시하는 문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특이하다.


능 앞의 장명등은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팔각장명등인데 다리에는 구름무늬가 섬세하고, 대석에는 둥근 원 안에 매·난·국을 조각한 점 또한 퍽 이채롭다. 장조가 추존된 왕임에도 무인석이 서 있고, 문인석은 둘 다 금관을 썼다. 이는 영릉(세종릉) 천장 때 폐지키로 했던 묘제(墓制)가 되살아난 것이고, 추존왕의 봉분에는 거의 두르지 않는 병풍석을 두른 것도 특별한 예우이다. 그토록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으니 정조가 아버지를 생각함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화성행궁 행차 재연


사도세자는 요즈음의 사이코 패스에 해당하는 인물이고, 혜경궁 홍 씨는 <한중록>을 남긴 한 많은 왕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왕권을 둘러싼 당파싸움, 적성을 무시한 조기교육,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 왕위에 대한 비정상적인 애착 등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융건릉을 모두 둘러보고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12첩 반상의 한식 상차림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린 상을 받으려고 하니 무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오늘만 받을 수 있는 행복이라 생각하며 맛나게 밥을 먹었다. 배가 고파서 이야기 나눌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숟가락 젓가락을 움직였다. 남이 차려준 밥상을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음식이 그런대로 괜찮은 거 같았다. 후식으로 문우 한 분이 예쁘게 깎아오신 단감과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용주사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나오지 않아서 잠시 길을 잃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용주사는 정조가 부친 장헌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이 절의 전신인 갈양사의 유물인 7층의 석조사리탑과 6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있다. 그 뒤쪽의 후불탱화(後佛幀畵) 역시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들인데, 이를 김홍도(金弘道)가 감독한 그림이라고도 한다. 2002년 월드컵 염원 탱화도 재미있었다. 연꽃 위에 축구공을 올려놓은 것이 재치 있다. 어쩌면 이 탱화와 스님들의 염불 덕에 우리나라가 4강 신화를 이룰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梵鐘)이 있으며,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發願), 보경을 시켜 제작한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있다.


나오는 길에 효박물관에도 들렀다. 탁본도 할 수 있는 코너가 있어서 아이들이 체험 학습으로도 좋을 거 같다. 다시 한번 ‘부모은중경’을 보며 정조의 효심에 감탄했다. 이번 답사를 통해 늦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아울러 정조와 사도세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거 같아 뿌듯했다. 나아가 그동안 허투루 보았던 조선 왕릉의 구성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효심 깊은 정조가 불현듯 나타나 오늘날의 우리들을 보고 무어라 말할지 내심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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