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살이, 특별하고도 평범한 이야기
곧 착륙이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목적지인 시안 셴양 공항에 도착합니다.
아...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착륙을 알리는 기내방송에 다시 한번 내가 진짜로 한국을 떠났구나 하면서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사십 년 넘도록 살아왔던 생활 터전인 한국을 떠나 생전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중국에서 정착해야 하는, 이런 긴장스러운 상황인데도 나는 어쩜 이리 잠이 잘 오는 것일까? 몇 권 들고 온 중국어 회화책을 두어 장 읽다가 잠이 들었으니, 역시 책은 나에게 최고의 수면제이다. 그나저나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데 입국 수속은 별 일 없겠지?'
'공항에서 남편한테 문자 보내려면 와이파이 체크해야지.'
'아이들 유괴당하지 않게 손 꼭 잡으라고 해야겠다.'
'남편 집에 가면 밥은 뭘 먹을까? '
짧은 시간인데 이렇게 많은 생각이 털실뭉치처럼 뒤엉켜진다. 생각할 여유가 어딨니.. 우선 포케 파이 전원부터 켜자.
아! 아이들..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기다가 비로소 아이들은 뭘 하고 있는지까지 생각이 미쳤다. 평소 같으면 가장 먼저 체크했을 일인데, 비행 중이라 뇌에 산소가 부족한 건지 처음 가는 중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외국 살이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생각과 판단이 멈춘 것 같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 속도 모르고 세상 즐겁게 기내 영화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기내에서 보낼 세 시간을 위해 간식을 잔뜩 챙겨 왔었는데 벌써 다 먹고 껌만 몇 개 남았다고 한다. 어이구 녀석들.. 나처럼 잠이라도 잤으면 좋으련만, 참말로 울 애들은 잠을 안 잔다. 그래도 칭얼대거나 뭐 해달라고 귀찮게 하지 않아 줘서 고맙네.
"이제 착륙한다, 모니터 끄고, 헤드셋 줘."
아이들에게서 주섬주섬 헤드폰을 받아 챙기고, 승무원에게 건넸다. 혹시 내려서 목마를 수 있으니 생수도 두병 챙겨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공항 풍경은 한국의 여느 도시 같은데, 과연 내가 진짜 중국에서 사는 것일까?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꿈틀꿈틀, 종아리 사이에서 묵직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맞다. 강아지도 있었지... 잠을 자면서 내 정신 주머니를 한국에 두고 온 것인지 현실 파악하는 것에 버퍼링이 걸린 기분이다. 정신 차리자, 정신!
우리 가족은 인간 이외의 생명체가 또 있다. 지금 내 발 밑에서 검은 눈을 반짝이는 우리 똥강아지 레오. 기내에서 반려동물은 가방이나 케이지 안에 넣고 좌석 밑에 놓아야 하는 규정 때문에, 공연히 이름을 불러줬다가는 만져달라고 짖거나 낑낑 댈 수 있으니 일단 아는 척하지 않기로 했다.
비행하는 3시간 반 동안 짖지도 않고 잘 참아준 녀석이 참 대견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새벽녘에 집에서 출발해서 한 시간 차를 타서, 공항에 도착하고 수속해서 탑승까지 두 시간 반,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3시간 반. 총 7시간 동안 이 좁은 가방 안에 갇혀서 쪼그려 앉아있는 녀석이 가엽고 기특하다. 에휴.. 너도 이게 뭔 고생이냐 싶지만, 그래도 한국의 부모님께 맡기는 것보다는 우리랑 같이 사는 게 더 낫겠지? 이 녀석의 속마음은 알 길 없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아니라고 해도 이제 와서 어쩌겠어?
신기한 동물의 소리
가볍게 착륙한 기체는 천천히 탑승구로 향한다. 희한하게도 창문 밖의 풍경이 마치 몇 번 온 것처럼 낯이 익다. 꿈속에서 본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첫인상이 나쁘진 않네. 벌써 성격 급한 승객 몇몇이 출입구 쪽에 나가 줄을 섰다. 나도 천천히 선반의 짐을 꺼내고 아이들에게 짐을 분배해줬다.
어깨에 메기 위해 강아지 가방을 의자에 올렸더니, 이 녀석 흥분해서 갑자기 꺼억 꺼억 거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포메라니안인 우리 레오는 흥분해서 호흡이 꼬이면 괴로워하면서 일분 가량 거위 소리를 낸다. 순간 주변 승객의 시선이 나와 레오에게 집중됐다.
"강아지야?"
"아닌 것 같아, 무슨 동물이지?"
"신기한 동물의 소리가 난다"
아.. 신기한 동물의 소리라니..
그래. 개가 거위 소리를 내니까 신기하긴 하겠다. 탑승구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부끄러울 겨를도 없이 우리도 서둘러서 각자의 짐을 챙겨서 뛰다시피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서두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전 세계 어디나 공항은 비슷하지만 특히 중국 공항은 입국 수속에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뛰어가서 앞쪽에 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비행기를 탑승한 승객일지라도 삼십 분 이상 늦게 지체될 수 있다. 우리는 공항에서 이동할 택시를 미리 예약했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곤란하다. 아이들을 다그치며 잰걸음으로 앞서가는 인파를 따라갔다. 2월이라 아직 추운 날씨였지만 긴장한 탓인지 공항 실내 온도가 높은 탓인지 땀이 줄줄 흘렀다.
드디어 입국심사대 앞에 도착했다. 내 앞으로 40명 정도가 있으니 이 정도면 선방한 셈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줄은 줄어들 기미가 없다. 하필 점심시간이라 담당자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염없이 40분 정도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경찰인지 공무원인지 모르겠지만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 앞에 선 나는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서 그 남자의 눈치만 살핀다. 중국이 공산국가라는 것이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만드는 이유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내 손이 너무 건조해서 지문 인식이 안 되는 것이었다. 손가락에 호호 입김을 불어보고, 손바닥에 비벼보고, 침도 발라봤는데 소용없었다. 보다 못한 보안원이 물티슈를 갖다 줬다. 그런데 물티슈로 손을 닦아도 역시 안된다. 저번에 동사무소에서도 지문 인식이 안 돼서 애먹었는데 하필 지금 또 이런 일이! 내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고 등 뒤의 땀은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핸드크림을 발라볼까? 뭐라도 해서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가방 속에 챙겨 온 핸드크림을 발라본다. 무사히 지문인식 성공! 휴.. 한시름 놨다.
나 왜 이렇게 소심해졌지?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서둘러 수화물을 찾으러 갔다. 소문으로만 듣던 검은 개가 킁킁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치즈랑 멸치랑 백진미 챙겨 온 것을 뺏길까 봐 또 가슴이 콩닥 인다. 다행히 검은 개는 방향을 틀어 다른 곳을 향해갔다. 휴... 안도하는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
이제 마지막 관문인 엑스레이 검사대만 통과하면 된다. 그런데 아이들 책을 가득 담아온 이민가방이 걸렸다. 중국에 입국할 때 책을 많이 가져오면 뺏기거나 전량 중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괴소문을 들은 터라 덜컥 겁이 났다. 그 안에 성경책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혹시 문제가 생길까 봐 꼭꼭 숨겨왔는데 제발 걸리지 말아라...
보안원은 보안검색대에서 위에 있는 책 몇 권을 펼쳐 보았다. 이럴 것을 대비해서 맨 위쪽에는 중국어 학습서적을 놨었는데 다행히 잘 넘어간 것 같다. 그런데 음식이 들어있는 다른 가방을 열어보라는 것이 아닌가? 아... 이 가방에는 치즈가 있는데..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남편이 시안에서 치즈와 유제품 사기가 어렵다고 겁을 줘서 한 달 정도 먹을 수 있는 슬라이스 치즈를 챙겨 온 것이 문제였다. 재수 없으면 뺏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뺏기게 되니 아깝고 억울해서 아이들이 너무 먹고 싶다고 번역기를 돌려서 부탁을 해봤으나 인정사정없이 빼앗아갔다. 아깝다.
김치가 들어있는 보냉 가방을 열어보고 김치냐고 묻고는 다시 돌려줬다. 치즈 빼앗길 때 서운함은 어디 가고 김치를 돌려주는 그들이 갑자기 고마워진다. 멸치 같은 건어물도 걸리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민 가방 네 개, 캐리어 두 개, 악기 세 개, 백팩 네 개, 그리고 개 한 마리. 꼭 필요한 책과 당장 입을 옷과 비상시 먹을 반조리 레토르트 식품만 챙긴 채, 나머지 모든 짐은 한국에 남겨두고 이렇게 우리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