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진보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이 세대의 무력함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읽고 나서

by 진가인


기술의 진보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이 세대의 무력함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벤야민은 사진 기술, 복제의 등장으로 인한 ‘저자의 죽음’을 롤랑 바르트보다 먼저 감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벤야민이 이 에세이를 작성하며 했던 두 가지 가정 중 첫 번째 가정은 현대의 복제 기술이 이제껏 전승되어 온 예술관에 속한 개념들, 예컨대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 비밀’과 같은 개념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가정은 오늘날의 대중이 예술 작품에 대한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 母胎라는 것이다.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읽히는 이 두 가지 가정을 기반으로 그는 기술이 가져온 아우라의 종말과 예술 본질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벤야민은 예술의 두 극을 ‘제의 가치’와 ‘전시 가치’ 두 가지로 분류하고 예술사를 이 두 극의 대결로 바라봤다. 제의 가치의 작품은 일종의 마법적 도구로서 그것이 놓인 장소와 밀접하며 효력과 기능을 위해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기술 복제로 인해 한 곳에 존재했어야 했던 것들은 이제 여러 곳으로 이동해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시 가치의 작품으로 축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직 우리에게는 어떤 의식과 주술이 계속해서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분명 예술의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적 가치로의 전환이 진품이 있던 장소에서 진품을 꺼내어버린 텅 빈 곳과 같이 인간 마음에 어떤 공허와 결핍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 텅 빈 마음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술 복제 시대를 받아들이고 만연한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 하기도 하며, 과거의 마법적 도구로서 기능했던 형식들을 흉내를 내며 위로하기도 한다. 초창기 흑백 인물 사진의 표정을 흉내 내는 듯한 근래 사진들의 표정들이나 아주 깔끔하고 깨끗한 영상을 구태여 네모난 알갱이 가득한 것으로 만드는 등의 갖가지 현상들을 발견한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의 진보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이 세대의 무력함’이라는 문장은 이렇듯 사진과 영상에 이제는 사라진 아우라를 인위적으로 입히려 하는 모든 시도에 대한 표현이다. 마치 신이 존재할 영역이 없이 구석구석 빛을 발하고 있는 기술과 과학의 세계에서 어렴풋한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신을 묘사하는 것처럼 이 시도는 정말로 무력해 보인다.

나는 이 무력함을 위로하는 것 자체가 예술의 기능이 될 수는 없을까 고민하고 싶다. 진정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의식에 근거를 둔다는 벤야민의 말처럼 나 또한 예술은 의식을 위한 도구로서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 나 자신의 자그마한 행동이 있는데, 곧 이사를 앞두고 수업 시간에 이삿짐을 어떻게 분류해서 포장할지 걱정하며 노트 한편 육면체의 박스들을 그리던 것이었다. 내 육면체 박스는 부엌 도구들과 신발, 청소기 등 이사 물품으로 꽉 차 있다. 옷은 특히나 많기 때문에 특별히 큰 육면체 두 개를 준비해야 했다. 마치 어린 왕자의 양이 든 상자처럼 내 집 안의 짐들을 모두 담고 있는 그 육면체의 낙서를 하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작품을 위한 드로잉이라든지 전시를 어떻게 구성해 보여줄 것인지, 새로운 집에 가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하는 모든 자그마한 드로잉들도 그렇다. 아마 동굴 벽에 소와 말을 그리던 원시인들도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벤야민의 말처럼 이제 예술은 그 제의적 가치를 버리고 전시적 가치로 달려간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전시해야 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은 이제 의식에 기능을 두지 않고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둔다. 최근의 담론들과 전시 서문들만 보아도 그렇다. 요즘은 그 작품이 감상자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보다 작품과 텍스트의 어우러짐과 논리, 설득력, 무엇보다도 동시 다발성이 더 중요한 듯 보인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나 그것을 보는 관람자 모두에게 그렇다.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시대에서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지, 예술의 전통적인 영역, 아우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 갈림길에 선 이 세대의 망설임은 혼돈과 무력감으로 나타난다. 현대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의도된 흑백 분위기는 때론 거짓말과 허례허식처럼 느껴지고, 아무 의미 없이 가상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수도 없이 복제된 이미지들은 세상을 읽어 나가는 것에 대한 피로감을 증가시킨다.

벤야민이 구분 지은 제의 가치와 전시 가치 두 극 사이는 좁혀질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그 사이에서 효과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나는 그 둘의 차이 또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사이를 가로지르는 선의 두께만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더욱 궁금하다. 기술과 의식 ritual의 경계선 위에 서서 열렬하게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고 중재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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