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구에게나 준비되지 않는 채 출발하는 시간 열차 같은 것인지도 모
산티아고로 여행을 떠난다.
40일간의 긴 여정을 시작하면서 많은 준비가 필요함에도 떠나는 날까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출발 날짜가 다가오자 억지로 필수 불가결한 것들만 챙겼다.
1. 40일간이란 기간
2. 세면 관련 용품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
3. 식사도 개인별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
4. 매일 걷는다는 점
5. 날씨는 다소 쌀쌀하고 일교차가 크다는 점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짐을 챙겼다.
남편이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에 함께 짐을 챙겨 주겠다는 것을 싫다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다. 여행 가기도 싫은 데다 그렇게 긴 기간 동안 기본적인 것들이 제공되지 않는 곳으로 여행을 보내려는 남편의 의도가 못마땅했다. 싫으면 싫다고 끝까지 말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화나고 속이 상했다. 여행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긴 기간 동안 걷는다는 것이 걱정되기도 했고, 남편의 강요에 떠밀려 가는 것도 싫었다.
떠나기 이삼일 전부터 여행 목록을 봐가며 마지못해 짐을 챙겼다. 여행 목록을 보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종로 5가 여행 전문 제품 판매하는 곳에서 침낭, 배낭, 스틱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쿠팡에서 양말 및 다른 제품들도 여행 목록에 준해서 얼추 준비가 끝났다.
정년퇴직하고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퇴임식을 마치고 마지막 교문을 돌아서 나올 때 불쑥 눈물이 솟구쳐 오르던 순간이 떠올랐다.
‘아, 내 삶의 한 자락이 이렇게 끝이 났구나’
그동안 있었던 온갖 상념들이 꼬리를 물며 떠올랐다.
첫 발령을 받고 설레고 들떴던 순간들, 처음으로 아이들 앞에 섰을 때의 기억.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빛나는 눈동자들, 해맑은 얼굴들이 가슴에 켜켜이 쌓여서 나를 살게 했다. 운동장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달려와 품에 안길 때 얼마나 벅차고 뿌듯했던가? 동료 교사들과 때로는 웃었고 때로는 싸웠으며 때로는 울었다. 수많은 갈등과 번민으로 가슴 아팠던 날들은 또 얼마만큼이었던가? 전남 수업 연구 대회에서 일등을 해 수업 명인이 되었을 때의 감격, 순천, 광양, 구례 지역 교사들을 초청해서 시범수업을 공개했을 때, 승진을 위해 난생처음으로 여수 초도라는 섬에서 지네와 거친 바람과 씨름하며 살았던 나날들….
승진 규정이 바뀌어서 좌절하고 절망했던 순간들 그리고 교감, 교장 승진 그 긴 여정을 지나오면서 스스로 돌아볼 시간도 없이 허덕였다. 가정과 일을 병행하면서 어떨 땐 죽을 것 같은 고통과 좌절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리도 벗어나고 싶었던 이 자리를 떠나게 되었는데 목이 메는 까닭은 무엇인가?
꽃자리라는 시가 생각났다.
‘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자리가 꽃자리이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이니라.’
맞다. 그렇다. 그렇게 내팽개치고 싶었던 그 자리가 꽃자리였다는 것을 마지막 학교 교문을 돌아 나오면서야 알게 되었다.
그 후 보란 듯이 남편을 광양에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온 나는 껍질을 까고 나온 어린 새처럼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결혼 후 남편의 직장 때문에 원치 않게 서울을 떠나 살던 나는 내내 혼자 떠도는 것 같은 고립감에 시달렸다. 삶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허무함과 살아온 날들에 대한 무가치함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날들이 너무나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날 숨 막히게 했다.
서울에 올라온 지 6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에 남편이 산티아고 여행을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고 나는 거절했다. 남편은 내게 꼭 산티아고 여행을 선물하고 싶다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럼 따로 가면 가겠다고 했다. 어떻게든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남편과 일주일 간격으로 각각 산티아고 여행길에 올랐다. 남편의 강권에 못 이겨 가게 된 여행길은 시작부터 썩 내키지 않아 준비도 소홀했다.
삶은 누구에게나 준비되지 않는 채 출발하는 시간 열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40일간의 길고 긴 여정에 준비도 없이 길을 나선다. 마음 없이 떠밀려 정리하지 못한 짐을 지고 길을 나선다.
전반전은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 질주했던 삶이었다.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백세시대의 서막을 열어야 하는 내 인생의 후반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산다는 것 자체가 여행이 아닐까? 이 길고 지루한 여행길에서 나는 지금 아무도 모르는 옆길로 빠져 잡목 숲에서 길을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어딘가로 떠났고 내가 가야만 할 어떤 곳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꿈을 찾아 숨어있는 길을 찾아 언제나 낯선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무엇을 만나고 싶은가?
내 여행의 화두는 이것인 듯하다.
“나 여행 떠나는 여자야” 하고 나 자신에게 속삭여 본다.
내 삶의 여행은 어쩜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