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언덕에서 여왕의 다리로
아침 7시, 팜플로나(Pamplona)를 떠나 뿌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중세 양식의 건물들이 고풍스럽게 늘어선 팜플로나는 도시 전체가 시간의 결을 품고 있었다.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la Real)의 고딕 중정은 빛과 그림자의 조화가 아름다웠고, 바로크 제단과 로마네스크 흔적이 어우러진 내부는 중세 순례자들의 기도가 깃든 공간이었다. 신앙심 깊은 순례자들은 미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대성당 뒤편의 라 시우다델라(Ciudadela)는 16세기 군사 요새였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 있다. 남서쪽으로 걷다 보면 푸엔테 델 이에로 거리(Puente del Hierro)를 따라가면 잔디광장과 나무 그늘이 이어져 있어 걷기에 쾌적했다. 이 길은 외곽 마을 카이루아(Cizur Menor)로 이어지며, 도시의 숨통이 트이는 듯한 해방감을 주었다.
처음엔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이내 맑고 쾌청한 하늘이 펼쳐졌다.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부엔까미노”라며 서로를 축복하고 응원했다. 그렇게 걷는 중, 나도 모르게 이 길에 취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보다 일주일 먼저 이 길을 지나갔을 남편이 생각났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복잡한 마음들이 순간순간 떠오르기도 하고 잊히기도 했다.
팜플로나를 빠져나올 때 여행자들과 주민들이 뒤섞여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침부터 모두 부지런히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은 경쾌하고 희망찼다. 차도를 건널 때 차들이 사람을 먼저 배려하며 멈춰주는 모습은 참 인상 깊었다.
카르멘 거리(Calle del Carmen)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다. 석조 건물과 아치형 창문, 철제 장식이 달린 발코니들이 중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거리 끝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Iglesia de San Nicolás)는 중세 방어용 건축 양식을 갖춘 독특한 성당으로, 이 거리의 역사적 깊이를 더해주었다.
카르멘 거리 끝에서 팜플로나를 가슴에 안고 “안녕”이라 작별했다. 다시 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날 수 있을까?
도시를 벗어나자 끝없이 펼쳐진 초지가 나타났다. 밀밭과 노란 유채꽃밭이 능선을 따라 수채화처럼 들판을 수놓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마치 자연이 그린 그림 같았다. 유려한 곡선을 따라 펼쳐진 유채와 밀밭의 조화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산과 들, 하늘, 사람과 생명이 자연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공존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바람도 싱그러운 4월 중순의 산티아고 길은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성경의 “보기에 참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생장에서 피레네산맥을 넘고 수비리를 거쳐 오늘로 나흘째 걷고 있다. 피레네를 넘을 때부터 발바닥과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이 느린 편이라 일행들과 떨어져 남자 순례자들과 함께 걷게 되었다. 그중 한 분도 발목과 발을 많이 아파했고, 우리 때문에 일행들이 자주 쉬어야 했다. 걷다가 양말을 벗고 바람에 땀을 말린 뒤 다시 길을 걷곤 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엔 덥고 땀이 흘러 힘들었지만, 함께 간식을 나누고 담소하며 동행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부엔까미노” 인사를 주고받으며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었다.
드디어 알토 데 페르돈(Alto del Perdón)에 도착했다. “용서의 고지”라는 뜻을 가진 이 언덕에는 철제 순례자 조각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걷는 사람, 말을 탄 사람, 지팡이를 든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의 조각상은 바람과 햇볕 속에서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며, 순례자의 여정과 인내, 희망을 상징한다. 우리는 조각상을 흉내 내며 사진을 찍었다. 알토 데 페르돈은 “Camino de Santiago 최고의 전망 중 하나”라는 문구가 새겨진 그곳에서 나바라 평야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능선을 따라 펼쳐진 평야는 마치 수채화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물결쳤다.
언덕을 지나 오테르가(Uterga), 무루사발(Muruzábal), 오바노스(Obanos) 같은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잠시 쉬어갔다. 마을마다 작은 성당과 바(Bar)가 있었고, 그곳에서 푸르덴셜에 도장을 받으며 나는 이 여정이 단지 걷는 길의 기록이 아니라, 마음의 흔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서 여왕의 다리(Puente la Reina)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드디어 도착했구나!” 저절로 함성이 터졌다. 황금빛 들판을 지나, 바람과 햇살을 온전히 품은 채 걸어온 길의 끝에서 마주한 이 다리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례자들의 인내와 믿음, 그리고 수많은 발걸음이 쌓아 올린 시간의 상징이었다.
뿌엔테 라 레이나는 11세기 산초 3세의 왕비 도냐 마요르가 순례자들을 위해 아르가 강(Río Arga)에 다리를 세우며 형성된 마을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다리는 여섯 개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까미노(Camino de Santiago)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나는 그 다리 앞에 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결혼, 출산, 직장생활, 그로 인해 얽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아픔 등 나를 향한 질문들. 삶의 고뇌는 어쩜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여왕의 다리를 건너면 또 다른 길이 시작된다. 길이 그렇듯 삶 또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이 도착의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 길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