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동창생을 만나러 갑니다
삼십년지기 여고 동창을 만나러 갑니다. 각지에 떨어져 살다가 1년에 한두 번쯤 만나니 연중행사처럼 기다려지는 좋은 날이 되었습니다. 아이들 키운다고 바빠 전화만 하다가 이젠 조금씩 여유가 생겨 한나절이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삼복더위를 헤쳐가며 기차를 타고 내려갑니다. 이런 날은 급행도 완행도 다 좋지만 목적지가 소도시다 보니 오늘은 선택 없이 완행열차입니다. 관용은 마음먹기 나름인지 간이역마다 서고 내려도 급하지 않고 오르내리는 승객들도 다 행복해 보입니다. 모두가 나처럼 반가운 이,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가는가 봅니다. 기차가 늦게 가니 나라도 속도를 내야겠습니다. 기찻길 따라 추억길로 날아갑니다.
교실 난로 위에 양은 도시락을 겹겹이 올려 둔 교실 풍경. 점심시간도 되기 전 반찬을 모두 넣고 마구 흔들어 비벼 먹은 도시락의 맛, 쉬는 시간마다 매점을 향해 뛰어가 먹었던 설탕 발린 꽈배기는 맛의 추억이 되었고, 시험공부 핑계로 책을 펼쳐놓고 수다만 떨었던 일요일 교정의 은행나무 아래 벤치. 마룻바닥 삐끗거리는 소리와 같이 울려 퍼졌던 음악실 피아노 소리. 그리고 야간자습을 마치고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바라본 별과 달이 달린 교문의 밤하늘은 언제나 꺼내 볼 수 있는 추억의 장면이 되었습니다. 그때 바라본 별은 원하는 꿈만큼 수없이 빛났고, 채워야 할 점수만큼 항상 비어있던 반쪽 달이었습니다.
여고 동창들은 이제 추억 속 나이보다 더 자란 딸과 벌써 장가간 아들이 있으니 오늘 만나는 친구는 도시락 같이 까먹었던 그 시절 친구인지, 아들딸 다 키운 중년의 아줌마인지, 잠시 세월정리를 해 보지만 만나면 바로 알게 됩니다. 저기 멀리서 뚱뚱한 아줌마가 손을 흔들며 한발 한발 다가오면 우린 바로 갈래머리 쫑쫑 딴 여고생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또 일 년에 한두 번 만나지만 벌써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갈지도 다 압니다. 특별한 날에 관한 이야기 -아들 결혼 이야기, 딸아이 취직 이야기. 하나도 안 늙고 그대로라는 인사 치래-는 서두로 마치고 본격적인 레퍼토리가 나올 겁니다. 다 번듯하게 잘 사는 것 같지만 각자 삶의 무게가 있으니 서로 힘겹게 저울에 올립니다.
가까운 곳에 친정 부모가 사는 장녀 친구는 까칠한 엄마의 성질과 그 성질에 나가 떨어진 올케 흉을 볼 겁니다. 올케 흉이 점점 못난 남동생에게까지 가면 1절이 끝나고 연이어 신세타령이 시작됩니다. 여고 시절에는 무서운 엄마, 아가씨일 때는 결혼을 총지휘한 엄마, 아기 키울 때는 독박 육아는 몰라주고 잔소리만 하던 엄마. 지금은 모든 효도를 당연히 받으려는 친정엄마 뒷담화입니다. 만날 때마다 나름 설루션을 나눠도 다음에 만나면 또 똑같은 줄거리가 전개됩니다. 친정에 갈 때마다 반찬 가지가지 만들어 냉장고에 가득 채우고 바로 집 안 대청소를 한다며 반백 년 이상 쓴 친구의 무릎관절도 만만치 않은데 손길 가는 곳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친구의 한숨 섞인 푸념을 10년째 듣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엄마가 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고, 가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맘에 걸리고 깔끔한 친구는 기어이 안방부터 싱크대 정리까지 다 해야 직성이 풀린다니 이 무게는 덜어낼 수도, 대신해 줄 수도 없는 혈육의 무게인가 봅니다.
또 한 친구는 10년째 사표를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늘 명예퇴직 한다고 노래 부르더니 정년퇴직하게 생겼습니다. 만날 때마다 사표를 내야 할 이유도 다양합니다. 한때는 MZ세대의 직장 후배가 너무 당돌하고 당차지만 틀린 것 같지도 않고, 맞는 것 같지도 않아 항상 이래저래 눈치를 보는 자신이 싫다는 것이 이유이고, 또 한때는 꼰대 상사가 이유입니다. 고쳐지지도, 고칠 생각도 없는 관행을 무조건 따르라는 명령에 본인도 나이 들어 저렇게 될까 겁난다는 것이 이유이더니 요즘은 눈만 뜨면 달라지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것이 사표의 이유입니다. 사표를 내야 할 이유만큼 가슴에 옹이도 늘어나고 각각 달랐던 이유처럼 사표도, 포기도, 퇴직금도, 자꾸자꾸 쌓여갑니다.
이제 저의 무게를 올려놓을 차례입니다. 언젠가부터 남의 편이 된 남편 흉을 늘어놓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인심 좋고 사람 좋다고 만나는 어르신들마다 칭찬을 받지만 집안에서는 아닙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직접 밥 차려 먹을 줄 모르고, 시어머니께 받은 보호를 마누라에게 그대로 받을 심상이니 밥을 차릴 때마다 심술이 납니다. 차 수리는 커녕 형광등 하나 못 가는 똥손이야기를 할 때면 잊어버린 묵은 과거사까지 다시 떠올라 억울에 열변을 토합니다. 아이들 키울 때 기저귀 한번 안 갈아줬다는 거, 장거리 여행을 다녀와도 반찬이 그대로였다는 거, 아이들 학교 한번 안 데려다준 서운함까지 다 나오면 친구들도 남편 흉에 장단을 맞춥니다.아무리 그래도 남편흉에 장단을 맞추니 또 그건 싫습니다.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우린 압니다. 점심을 먹고 창 넓은 찻집에서 향 좋은 커피를 마실 때면 그런 엄마가 있어 아버지가 덜 걱정되고, 반찬 해 가는 것도 이제 밀키트가 있어 대충 여유가 생겨 쉽게 냉장고를 채우고, 대청소는 퇴직한 남편이 제법 거들어 수월하다고 합니다. 엄마가 늙었는지 자기가 늙었는지 싸움발이 점점 약해진다며 험담이 점점 고마움으로 바뀝니다. 몇 년 전부터는 그렇게 흉보던 남동생 부부도 자기들이라도 잘 사는 게 어디냐며 가끔 올라오는 여행 기록을 남긴 부부 프로필사진에 만족하게 되네요. 명절만 되면 남동생 대신 오는 고깃덩어리도 친구가 가져와 먹는다며 헛웃음 짓습니다. 같이 웃습니다. 오랜 친구는 다 압니다. 그 친구가 먹는 고기 맛을.
사표도 타이밍이라고 투정 부립니다. 2년 전 남편이 먼저 선수 치며 퇴직하고 귀농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낯선 곳에 혼자 못 가는, 아니 안 가는 남편 따라 주말에는 농사까지 짓는다며 몸 여기저기에 난 생채기를 보여 줍니다. 농사일도 생각보다 힘들고 퇴직 후 공사다망한 남편을 보니 퇴직도 걱정된다며 생각을 고쳤답니다. 출근할 수 있는 것도 새삼 고맙고, 부딪쳤던 직장 동료도 새록새록 이해가 되고, 먼저 걸어온 길이니 후배들의 고충도 알 것 같고, 꼰대 상사가 버럭 화를 내도 감정 쓰레기가 분리수거까지 된다며 아예 관계애찬까지 갑니다. 몇 년 남은 기간 동안 마지막 현장 기록을 남긴다나, 자성록을 쓴다나, 원 없이 잘해 보겠다는 각오까지 보입니다. 신이 났습니다. 벌금 내고 자랑하라고 브레이크를 잡지 않으면 밤샐 기세입니다.
트리오로 남편 흉을 보다가 그래도 자식 걱정같이 하고, 여기저기 아플 때 아프다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남편밖에 없다며 자식들 제 갈길로 하나 둘 떠나면 남는 건 가족이 아니라 부부라고 진심으로 남편 걱정을 합니다, 근력 빠진 남편 몸에 좋은 음식레시피를 못내 받아 적습니다. 다들 이렇게 사나 봅니다, 불혹의 나이에 세상 유혹 다 흔들리고,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 지천명에 하늘 올려다볼 시간조차 없지만 그래도 넘어진 만큼, 둘러 둘러 간 길만큼 내벽이 생기니 신 레몬이 레몬에이드가 되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동색이 되어 가는 중년인가 봅니다.
모든 것이 찬란한 눈부신 청춘은 날 버리고 가 버렸지만 꿈 많았던 학창 시절에 희망을 심었고 아무것도 모르고 내게 온 자식을 키운다고 울면서 보낸 엉성한 워킹맘의 역할도 나보다 더 크게 자라 의젓한 사회인이 된 아이들을 보니 이제 끝이 보입니다. 눈만 뜨면 달라지는 급변의 세상에 맞서 파도타기 하면서 노심초사 밤을 지새우며 지킨 몇장 남지 않은명함도 이제 새로 찍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굽이굽이 혼자 온 길 같았는데 부모님이 계셔서, 남편이 있어. 자녀들이 붙잡아 줘서. 그리고 오늘같이 마음과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오래된 여고 동창이 있어 여기까지 잘 온 거 같습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비바람이 불면 비가 와서 좋고, 햇살이 비치면 해바라기를 해서 좋았고 힘들었지만 멈추지 않고 작은 걸음이라도 행진해서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흔들리는 차창으로 밤이 내립니다. 밤하늘 별만큼 빛나진 않아도 오랜 친구들과의 해후로, 커피 한잔의 수다로,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넉넉한 보름달이 되어 밤하늘 가득 채웁니다. 오늘도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