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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빨간 갱년기 Mar 09. 2024

더 킬러 영화가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하여

#1

 한때는 많이 읽어야 좋은 줄 알았고, 많이 봐야 남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책과 영화는 나를 향해 있지 않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채 외부에 겉돌고 있었다. 

그 시절 보았던 책과 영화가 울림이 크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궁색한 변명 같지만 내 속에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난 왜 책을 읽고 난 후 기억나는 게 별로 없지?”

“비디오 보는 것처럼 책을 읽으니 그렇지. 줄거리만 읽는데 책이라고 뭐 달라. 생각하면서 읽어야지”

“누가 그걸 모른데. 그렇게 말하니 더 재수 없다.”


 남편이 사실을 말하자 정곡을 찔린 느낌이 들었다. 나도 안다. 책을 읽을 때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심오한 철학책은 내게 너무 형이상학적이고, 고매한 고전소설은 내용을 따라잡기 급급했다. 똑같은 책은 재독 삼독한다는 것은 시간이 아깝기도 했지만 이미 알아버린 이야기가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다. 책과 영화는 나에게 그저 고급 진 유흥거리였을까.


#2

 한동안 책과 영화에서 멀어져 있었다. 먹고 사는 것이 바빴다면 핑계가 될 수 있을까.

그러다 독서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혼자서 책 읽는 것이 힘들었다. 사람들과 더불어 읽는다면 내가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은 하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시작했다. 지금도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정독보다는 통독에 가까운 책읽기를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글자에 집착하지 않고 맥락을 보기 시작했다. 글의 내용이 내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깨비불처럼 이 책 저 책을 넘나들면서 마구잡이로 읽고 있었지만 그래도 책과 책 사이에서 무엇인가 연결이 끈들이 보였다. 

과학책속에서 학자들이 같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 품앗이 하듯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명하게 다른 견해들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서로 도와가며 연구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문학도 신화나 전설에 기대어 서로가 공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한 파묵의 ‘빨간머리 여인’은 천 년 전 서양의 비극적 이야기 ‘오이디프스’와 동양의 ‘왕서’이야기가 현재의 주인공의 삶 속에 깊이 녹아 들어와 숨 쉬고 있다. 

오르한 파묵은 전설이나 신화의 이야기가 단순히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지금의 삶속으로 끌고 들어와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간다는 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나에게 속삭이고 있다. 

천 년 전에도 백 년 전에도 사람들은 살았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3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시각적 자극이 너무 강하게 다가와 불편하게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감정의 몰입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소모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더 킬러를 보게 되었다. 요즘 영화 보는 습관이 영화를 보기 전 검색창에서 영화평을 찾아보고 보는 것이다. 괜히 어설프게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주절주절 거리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주절거리는 걸까. 이 영화 끝까지 봐도 괜찮을까. 초록창에 검색해 봐야하나.영화가 중반쯤 흘러갔을 때 내가 길을 잠시 잃어버렸다. 검색을 하지 않으면 끝까지 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댓글에 뻔한 스토리인데 자기 스타일을 입힌 영화라고 했다. 스타일리쉬 한 수작이라고. 개수작 같은 소리 같았지만 다시 영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영화나 글의 스토리는 이 세상에 모두 나와 있다. 작가의 힘은 이야기가 아니라 문장이다. 아마도 댓글에서 말한 간지 나는 자신만의 스타일 일 것이다. 


#5

 이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세상밖에 내놓을 수 있다. 작가가 되는 것 도 감독이 되는 것 도 예전에 비하면 방법과 길이 너무 쉬워졌다. 하지만 이 일은 아무나 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언어로 내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들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무수히 쏟아지는 많은 말들 속에서 내가 세상에 또 하나의 말을 보태고 있는 이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냥 이 말들을 가슴에 담고 있지 않고 뱉어내고 싶었다. 오늘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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