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남경민
남경민 작가는 2005년에 자신의 일상 생활 공간이 곧 자신의 삶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거장들의 공간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개인의 공간에는 자연스레 그 사람의 취향과 고민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기물들, 자주 읽는 책, 가구의 선택과 배치 모두가 사용자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남경민은 동서양 예술 거장들의 방을 그렸다. 그 중에서는 현재까지 남아있어 그 형태를 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구현 된 공간이다. 즉 남경민이 이해한 거장들의 내적 세계를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남경민은 작가의 방을 그리면서 휘장이나 문 틈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는 기법을 사용한다. 공간의 내부는 대부분 투시기법을 통해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휘장 너머로 보이는 깊은 공간은 작가의 은밀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관람객은 거장의 세계에 초대받아 공간을 감상하게 된다.
부엌은 요리를, 작업실은 창작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은 그 쓰임에 따라서 다르게 꾸며진다. 남경민은 작가의 공간 중에서도 특히 작업실을 그렸다. 작가의 작업실은 창작의 산실로서, 내면을 성찰하고 연구하는 장소이다. 작가는 작품을 위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연구하는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낸다. 그렇다면 작가의 방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남경민은 거장들이 지녔던 다양한 면모들을 상징적인 오브제로 그렸다. 시간의 유한성과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해골과 초, 작가의 투명하리만치 순수한 내면을 표현하는 유리병, 끝내 이루지 못하였지만 늘 가슴에 품었던 이상을 담은 날개, 신에 대한 경외와 숙명을 이야기했던 예수 고상 등이 바로 그 오브제다. 이 오브제들은 공간 속에서 특별한 규칙 없이 무심하게 놓여 있다. 이 오브제들 중에서 작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책으로서 등장하는데, 거장의 스승들과, 당대에 주류를 차지했던 미술계의 담론과 주요 도서가 자리하고 있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의 영향을 받아 활동했던 거장은 비어있는 의자로서 표현했다. 비어있음을 통해서 거장의 부재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자리가 남아있음을 통해 거장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또 다른 빈 자리들을 통해서 작가 남경민 스스로와 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가 누구라도 그 거장과 한 자리에 앉아 예술로서 시대와 공간을 넘어 소통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공간 속의 인테리어는 과거의 것이면서도 현대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로코코, 바로크, 그리고 모더니즘의 경계에 서 있는 다양한 문양과 가구들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다. 마치 과거와 현대가 중첩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데 이런 양상이 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한국 문예인의 방이다. 김홍도의 방에 커피 기계와 유화 붓이 놓여지고, 황진이의 방에 러그가 깔린다. 신사임당의 방 거대한 거울 너머에 이젤이 놓여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동양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것들이 서양 예술가들이 선호하던 방식으로 표현되면서 세련된 분위기와 함께 유머를 자아낸다.
다양한 오브제들이 상상속의 공간에 현실감과 사유의 매개를 채우는 역할을 한다면, 거울과 창문은 거장들의 멈추지 않는 다각적인 상상을 공간적으로 표현한다. 작품 속에는 여러 모양의 거울이 등장하는데, 같은 공간 안을 비추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사물이 비춰지거나, 다른 방향의 것을 비추기도 한다. 거장들이 가지는 새로운 관점과 반짝거리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거울을 통해서 공간 안에 끼워진다. 새로운 방을 추가할 수도 있었음에도 남경민은 2차원 평면의 캔버스 위에 거울을 통해서 공간을 중첩하는 방식을 택했다. 거울은 비추는 각도에 따라서 다른 사물을 비출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남경민이 상상한 작가의 내면 세계이지만, 그 내면에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거장의 생각이 존재함을 암시하며 나머지는 관람객의 상상에 맡긴다. 마치 한편의 잘 준비된 연극처럼 볼 수 있는 공간을 보면서 만들어지지 않은 무대를 자유롭게 상상하게 두는 것과 같다.
남경민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문을 뚫어두었는데, 창문 속에는 언제나 자연이 함께하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자연은 창작의 근원적 에너지를 얻는 곳이면서 가장 큰 스승이기도 하다. 창문마다 서로 다른 풍경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 공간들이 서로 이어지기도 떨어지기도 하면서 초현실적인 통합을 이뤄낸다. 동양 예술가의 방에 보이는 풍경과 서양 예술가의 방에 보이는 풍경이 서로 비슷하게 이어져 있어, 예술가들이 얻는 자연 에너지가 동서양을 초월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남경민은 최근 정원 시리즈를 그리고 있는데, 정원은 남경민이 생각하는 이상향이다. 작업실을 투시도법을 활용해서 깊이감을 중점적으로 표현했다면 정원시리즈는 보다 평면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늘이 푸르고 꽃이 만발한 한낮, 수영장이 보이는 이 한적하고 아름다운 공간에는 티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거장들과 남경민이 오롯이 만나는 티타임이 준비되어 있다. 작품에는 대부분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는데, 나비는 남경민의 영혼이면서 거장들과 남경민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관람객을 공간 안으로 불러들이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는 밤의 정원 작업도 이어나가고 있는데 사위가 어두워진 밤의 시간, 시야의 한계 속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나비, 반짝거리는 수영장 그리고 아름다운 고전양식의 건물이다. 평화로운 밤의 정원에서 작가는 사위가 고요해진 가운데 고독을 느끼면서 내면을 깊이 돌아보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자신만의 온전한 유토피아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