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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Jan 02. 2024

티라미슈라떼

2024년1월1일 행복일기

오전에 갑자기 1번의 전화가 왔다. 연말에 친구들과 부산으로 여행을 가서 새해 첫 일출을 다던 - 서울사람된 지 10개월차인 첫째 딸이다. 어제 야의 종소리를 티비로 집에서 즐기느라 늦게까지 잠을 자다가 한껏 신이 난 1번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 나 좀 있다가 대구 집에 간다"

"엥? 지금은 어디여? 몇 시쯤 오는디?"

"지금은 부산인데 점심때쯤 도착할 듯"

"일출은 봤어? 소원은 빌었고?"

"어... 밤새웠어. 너무 피곤해. 집가서 좀 자고 내일 서울갈래."

"알았어. 엄마랑은 할아버지댁에서 점심먹고 올테니까 와서 좀 자고 있어."



정신없이 자고 있는 1번을 들여다 보다가 냉장고를 뒤진다. 자느라 밥도 못 챙겨 먹었을 터.

 바람에 오랜만에 다같이 집밥이나 따슙게 한 그릇씩 해야겠다. 오늘은 마침 새해 첫 날이니까. 새해 첫 날부터 5명의 가족이 다 모이는 날이 앞으로 얼마나 있으랴.

지난 주에 종강을 했다며 1번이 집에 와서 며칠을 있다 가느라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저녁을 함께 먹긴 했지만 맵고 자극적인 대구의 음식이 너무 그리운1번의 취향에 맞추느라 집밥이 아닌 맵고 자극적인 배달 음식으로 차려진 저녁상을 두어 번 함께 했었다.

그때 다녀가면서 담 달에 있을 사촌언니 결혼식때나 또 보겠구나 했는데 갑작스런 예상 못한 손님의 등장에 마음이 바쁘면서 또 좋다.


냉장고를 뒤져 1번이 좋아하는 두부를 잔득 넣고 청국장찌개를 끓이고 빨간 고추가루를 넉넉히 넣어 맵쌀하게 돼지고기를 양념에 재운다. 1번이 좋아하는 오뎅볶음과 계란말이도 준비하고 2번이 좋아하는 잡채를 하려고 사다놓은 시금치도 삶고 당면도 불렸다.

양이 부족할까봐 당면이랑 두부를 더 사오라고 남편에게 심부름을 시켰더니 장바구니를 챙기며

"오늘은 무슨 잔치날이냐?1번 깨울까?"한다.

물을 마시러 나온 2번도 오뎅볶음을 집어 먹으면서

"평상시면 요기서 끝났을 상차림인데... 오늘은 먼 이래? " 하면서 국그릇, 밥그릇과 계란말이, 김치통까지 경계를 지어 보인다.

"어랍쇼? 집에서 밥도 안 먹는 사람들이 새해 첫 날부터 시비걸지 마라. 집에서 밥을 잡사야 밥을 하지. "

생각해보니 요사이 다같이 - 대구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4인도 다같이 모여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요즘 계속 초등학생인 3번과  단둘이서 저녁을 먹는 시간이 많았던 지라 소세지, 햄, 계란후라이, 삼겹살... 딱 초등 입맛의 단조로운 상차림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곤 했다. 지지고 볶고 하는 음식이 오랜만이기도 하다.

간만에 활기찬 주방에 신이 난 남편이 1번방- 지금은 3번 방으로 1번을 깨우러 향하는 뒷통수에 대고 다급하게 외친다.

"더 자게 냅둬라. 잇다가 방문만 살째기 열어나라. 배고프면 일나게. 된장냄새맡으면 저절로 깬다. 쟈는..."




"엄마, 요즘 간이 좀 짜졌어?"

"서울살이에 니 입맛이 싱거워 진 게지. 이게 머가 짜냐?"

"나는 짜. 짠 거를 먹었드니 달달한 과실 음료수가 땡기는디? 아빠?"

차려진 밥상을 깔끔히 싹 비운 딸들이 달콤한 디져트를 찾는다. 오랜만에 맵고 적당히 짜고 달달한 집밥을 먹고나니 나도 달달한 커피가 생각이 난다.

나는 뒷정리를 하고 아빠와 아들을 아파트 상가에 있는 커피 집으로 보내기로 했다. 딸들은 뭣이 이름이 복잡하게 어려워서 아빠가 아들에게 메모를 시킨다. 

'초코밀크티펄추가', '돼지바밀크쉐이크'


나는 뭘 먹지? 그 집에 커피들은 별로인데, 간만에 요리를 좀 했드니 달고 맛난 커피가 댕기는데, 저 아래 대형프랜차이즈 - 맛을 기대하기 보다는 늘 표준화되어 일괄적인 안정적인 맛이 보장되는 커피 집까지 보내려니 두 남자가 반발할 같으고.

또 표준화된 커피집에는 애들이 좋아하는 쉐이크니 스무디니 요거트니 하는 달달이들이 다양하지가 않으고. 그냥 가까운 데로 보내려니 메뉴가 고민이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씁쓸한 커피맛도 나야 딱인데... 달면 너무 달고 씁씁함도 밍밍함으로 녹아내리는 그 집의 커피맛이 떠올라 고민스럽다.

차라리 집커피를 마실까하다가 왠지 오늘은 남편이 사주는 커피를 먹어야 겠다. 요리를 너무 했어.


한동안은 아인슈페너가 괜찮드니 3번 시켜 먹고 나니 내 입맛이 문제인지 레시피가 문제인지, 느끼한 것 같으고, 한동안은 흑당라떼가 괜찮드니, 요사이는 너무 달다.

인터넷으로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 보다가 '티라미슈라떼'가 눈에 들어와서 '따뜻하게' 라고 메모를 해서 두 남자들을 내보냈다.


거실에 두런두런 앉아서 음료를 나눠 먹는다. 쉐이크니 스무디니 그런 음료는 나는 별로다. 너들이나 먹어라하고 보니 나도 늙긴 늙은 것 같다.

시나몬인지 먼지 모를 가루가 잔득 든 티라미슈라떼를  저었다. 크림과 커피가 잘 섞이게 정성껏 저어서 마셔 본다. 생각보다 입맛에 맞다. 기대를 안 한 커피가 입맞에 맞으니 갑작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의 이 분위기와 온도가 한 몫을 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흡족하다.

"어? 맛있네. 이거... 아빠, 먹어봐. 너도."

머그 잔에 반을 따라서 남편에게 주고 이제 커피도 한 잔씩 한다며 갓 커피맛을 배운 20살의 큰 딸에게도 한모금을 건넨다.

"가루가, 이게 먼지는 모르겠는데, 이게 쌉싸리한 , 달달한 크림이랑 커피를 넘기고나니, 이 가루 뭉쳐진 게 쌉쌀하이 단 맛을 잡아주면서 살살 녹으니맛이 괜찮은데?내 스타일인데, 어때?괜찮지?" 하고 1번을 쳐다본다.

"어, 이거 핫초코가루네. 코코아가루. 그러니까 달고 맛나지."

"아, 그러네. 쌉싸리한 종류의 핫초코 가루네. 역시 너는 절대미각이야. "

이런 얘기들을 주고 받으면서 한 모금 더 들이켠다.


전에 20년이 훌쩍 넘은 대학친구들의 단톡방이 몇 달 만에 새해인사로 새 글이 올라 왔다. 마치 영업용 멘트같은 어색한 인사가 낯설으면서도 방갑다. 먼저 인사를 건네 주는 친구는 쌉싸레한 핫초코가루같이 새로운 기쁨을 준다. 티라미슈라떼를 마시며 진심으로 오랜 친구들의 행복을 잠시 바라 본다. 46살이든 47살이든 우리 모두 행복하자. 행복하기에도 아까운 시간들이다며...

그러다 문득, 나는 행복한가? 누군가의 행복을 기원하는 말들을 하는 나는 과연 행복한가?

스스로 행복한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내가 보내는 행복의 말들의 과연 유효할까?


이렇게 내 행복을 의심하다보니 조금 전에 가족들과 티라미슈라떼를 나눠 마시며  커피 취향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의 나는 기분이 좋았다. 분명 티라미슈라떼 한모금에 기뻤었다. 잠시 이 순간을 행복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좋아하는 맛을, 좋아하는 취향을 나누며 이야기를 하는 순간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쌉싸레한 초코가루가 내게는 잊고 지냈던 행복의 맛을 떠올려 주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빌기 전에 내가 행복한 순간들을 먼저 찾아내는 2024년이 되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새해에는 행복일기를 써보기로 다짐한다. 

'티라미슈라떼'처럼 잊고 있었던, 혹은 나도 몰랐던 내 찰나의 행복한 순간들을 찾아내서 기록해 놓아야겠다.

새해에는 누군가들행복도 간절히 바라겠지만, 나의 행복취향부터 먼저 찾아내어 더 행복해진 내 모습으로 그 누군가들의 행복을 빌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1년 뒤에 오늘에는 행복일기가 가득차 있으면 좋겠다.


"Happy new year, 2024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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