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시작

공부방의 아이들

by 이혜주

옛날 옛날에 MMJ란 아이가 살았습니다.

(이름을 풀네임으로 불러야 느낌이 확~ 사는 아이인데, 그래도 개인정보가 느낌보다 더욱 중요한 세상이니 아쉽지만 MMJ에 만족합니다.)


아이를 처음 만난,

한 30분 동안을 쉴 새없이 곧 태어날 막내 동생의 얘기로 수다꽃을 피우더니 또 30분을 졸졸더니

나머지 30분은 그냥 아예 업어져 자더랍니다.


참 어이가 없 낯설기만 한 요즘의 14세 소녀들의 정체가 - 꼴랑 27세 뿐이 아니 되던 아주미가 나이타령이라니- 참으로 궁금하여

"너, 중학교와서 (첫 중간고사에서) 수학은 몇 받았니?" 하고 몹시도 세속적인 질문을 버렸

답니다.

그러자 나보다는 일단 한 수 위일 거 같은 아주 해맑고도 당당한 이 아이는

"저요?19점요~" 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첨 만난 , 아랫 층인 우리집으로 다시 내려 오며 아이를 어찌 해야 할까. 과연 내가 감당할 수가 있을까.

결혼 , 몇 달만에 이 낯선 동네서 첨으로 성사된 고용을 취소하고 다시 백수 아주미의 일상을 살아야 하나 마나 심각히 고민했죠.


게다가 늦둥이 막내 임신과 연년생 사춘기 두 딸의 육아로 몹시 쳐 보이는,

나의 임신 동기이자, 이 낯선 동네의 유일한 나의 말벗인 저 아이의 어머님께는 차마 이 고용을 물르겠다는 말은 못 하고 일단 이 아이를 지켜 보기로 했습니다.



째 만난 ,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아, 이 아이는 지금 사람이 너무 그립구나.

지금 이 아이는 학습보다 자기 얘기들어 줄 사람이 너무 필요하구나. '

어차피 고용도 불안정한 마당인어디 네 얘기나 한번 들어 보자 싶어서, 시간씩을 떠들어 대는 이 아이의 수다를 가만히 지켜 보다

자기 집으로 올라 가기 직전에 수학 공식을 하나씩 주며 "요거는 꼭 외워래이~" 했습니다.


째, 네 수업에서도,

이 아이의 허무맹랑한 수다를 들어 주다가,

그 수다 사이를 교묘히 비집고 들어 가서 수학 개념을 하나씩 하나씩 꾸역꾸역 주입시키려 용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아이가 저를 살짝 신뢰를 합디다.

전혀 풀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문제들이었는데, 두 문제를 혼자서 풀어 내는 자신에게 놀라워 합디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어느 순간부터는 막내 동생의 출산과 육아스토리가 수학, 영어 습법 관련 수다로 이어질 때도 있습디다.


마냥 들어 줄 수만은 없기에 가끔은 무언의 협박도 동반했습니다.

너의 이 허무맹랑한 수다들을 잘 들어주는 몇 안 되는, 아마 거의 유일한 나와의 인연은 너의 성적 향상이라는 연결고리로 엮여 있음을 늘 인지시켜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기 5문제를 풀고 다시 듣도록 하자" 로 정리해주면 눈치가 빠른 이 아이는 자기의 이야기를 얼른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 5문제를 후딱 풀어 내곤 합디다.


그렇게 한 반쯤이 지나 기말고사를 치루었는데,

이 아이의 수 시험의 점수가 19점에서 68점을 받는 기염을 토해냅디다.

어머니께서 산후조리중이심에도 친히 저희 집에 내려 오셔서 제 두 손을 잡으며 감사해하십니다.

한참이나 어린 막내 동생뻘인 저에게 선생님덕분이라며 깎듯하게 인사를 하십니다.


그저 이 아이의 다양하고 허무맹랑한 관심사들을 살짝 학습쪽으로 포커스를 돌려 주기만 했을 뿐인데 이 아이는 금세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나와의 수업시간에 절대 졸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몇 달 간은 학습도 학습이지만 늘 외로움을 수다스러움으로 표현하는 이 아이에게,

남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남이 관심이 없는 얘기를, 아주 적절치 못 한 때에 혼자만 떠들어대다 보면 결국에는 아무도 내 얘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될 거라는 삶의 지혜같은 것을 하나 둘씩 스며들게 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헌데 또, 나중에 알고보니 그 아이의 어머님이 또 우리 동네 왕마당발이(요즘 표현으로는 핵인싸쯤?)셨니다.

수학이 19점이던 아이가 68점을 받은 지 달이 지나지 은 여름 방학에 같은 학년으로 한class를 떡 하니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흔한 광고 전단지 한 돌리지 않고

동네 수학쌤이 된 지 18년쯤 되었나 봅니다.

그 때 뱃 속에 있던 큰 아이가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니 말입니다.


중3 말쯤에 MMJ네는 더 넓은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고 나의 첫 제자와의 인연도 간간히 들려

오는 소문에 의지했습니다.

MMJ가 병설 유치원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해 들었 때, 소름이 끼쳤습니다. 가끔씩 행여나 날라리의 길로 접어 들지는 않았으려나, 이 아이의 인생 경로가 평탄치는 않을까 봐 늘 걱정이 되었는데, 선생님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더 정신머리를 단디 챙겨서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여 학업과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월급의 전부를 적금으로 털어 넣어 야무지게 모아서 언젠간 사립유치원을 짓는 자금으로 쓸 거라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신여성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꼴통을 직이면서 제 디카에다 찍어 놓은 눈썹 없는 저 사진을 저는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잊을 수가 없는 아이입니다.

가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일상의 테두리를 못 벗어 나고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문득, 이 사진을 꺼내어 MMJ을 떠올려 봅니다.

처음 시작의 순간을 떠올려 보면 내일을 새롭게 살아갈 용기가 나거든요.

그 때의 나를 떠올려 돌이키다 보면 감사한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스쳐 지나 가는 모든 인연들이 나를 어른으로, 사람으로써 성장하게 잡아 주었음에 특히나 감사스럽습니다.

그 감사한 인연들을 이제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아 보렵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하게 된 일이지만

같은 일을 10년 이상, 20년 가까이 하는 것을보면 이 일은 제 일이었나 봅니다.

사실, 아직도 가끔씩은 자신없고, 아이들과의 일을 수시로 고민하고 걱정합니다.

나의 영향력이 과연 이 모든 아이들에게 긍정적으로만, 선하게만 작용될 수 있을까 곱씹고 또 곱씹어 봅니다.


무에, 사교육자 나부랭이가 보람을 찾아 나서나 비웃음을 유발할 때에도 저의 내면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이 존재해 있었습니다.

가끔 어쩔 수 없이 성적 향상이 전부인 냥 시험에 집착을 하는 사교육쟁이의 삶을 사는 인생이지만, 진실로 성적 향상에서 오는 보람은 1보다도 적었습니다.

오히려 나로 인해 긍정적으로 변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세상 짜릿하게 나를 보람되게 했고

그러한 이유가 18년이란 시간을 한 가지 일을 하도록 견디게 해 준 것 같습니다.


그러다 40대에 들어선 어느날엔가

문득 한 가지 업종의 일을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하면서 살게 해 준 일이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다를 깨달았습니다.

동네의 작은 부방의 수학쌤이지만 나 스스로에게

만이라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 보고 내일도 또 나의 모든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열심히 살아보렵니다.




언젠가 술이 기분 좋게 취한 밤에,

내 딸아이들에게 엄마는 죽기 전에는 꼭 한 번 책을 써 볼 거라고, 주제가 뭣이든지 뭣이라도 쓰고 말 것이라고.

사람이 태어나 한 번뿐인 인생인데,

무언가 내가 살다간 흔적을 남겨 놓고 사라져야 하지 않겠냐.

엄마는 인제 늙고 능력도 없어서 더 유명해지고 더 성공할 일도 없을 거 같으니,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면서 나의 존재의 흔적으로 유일하게 남겨질 내 자식들 마음 속에 큰 사랑으로 야무지게 추억는 일상을 살다가 살다가.

그러다가도 아쉽고 섭섭한 어느 가을날에는 나는 글을 쓸꺼다. 그렇게 내 이름 세 글자를 세상의 어느 한 모퉁이에는 자그마하게 남겨 두고 후회없이 사라지련다.

하고 아직까지는 내 유일한 존재의 증거들에게 다짐같은 선언을 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거대한 생각만 말고 작은 실천을 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야기는 꼭 저 아이, MMJ로 시작하려고

늘 잊지 않고 기억하고 또 기억했습니다.


(제가 가르친 모든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글씨체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개인정보인지라 이니셜 처리했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