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양. 엉뚱소녀. 귀요미공주. 오지라퍼. 쌍남자
공부방아이들
시험이 끝난지 만 2시간이 지났다.
엉뚱소녀의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저 지난보다는 괜찮은 거 같아요~]
'당연히 지난 시험보다는 괜찮아야지. 그보다 더 나빠질 것이 어디있냐!!' 속으로 되뇌여 보지만
이 여리고 착해 빠진 아이가 시험 직후 2시간 만에 같은 그룹 친구들 5명 중 1등으로 문자를 준 것 만으로 너무 기분이 좋고 감사했다.
지난 시험 때만해도 나를 피하고 연락도 외면하면서 무슨 큰 죄인인 것처럼 나에게 사죄의 말을 하던 너에게
[네 시험을 망친 것이 왜 나한테 미안할 일이냐,
너의 노력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 너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라고 답하면서 너무 속상했다.
중학교 수학, 이 따위가 뭣이 중하다고 너처럼 예쁘게 웃고 착해 빠져서 넘치는 배려로 주변을 따스하게 하는 소녀에게 이런 좌절감을 맛 보게 해야 하는가 안타까웠다.
마음으로는 너를 꼭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지만, 나는 또 단호한 수학쌤이 되어야 한다. 그게 내 일이니까.
절대 고치지 않는 너의 나쁜 학습 습관을 어떻게 단호하게 잡아 주어야 할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숫자로만 너를 판단해야하는 너의 수학쌤인 내 신세가 또 나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그런 네네양의 ㅡ 엉뚱소녀의 처음 별명은 네네양 이었다. 이해가 하나도 안 되면서 무조건
"네네~" 하며 착한 학생 각박증이 있는 것 같은 아이를 보며 네네양~ 이라고 놀려 주었다. 자존심은 지켜주면서 유쾌하게 이 소녀의 이런 나쁜 버릇을 고쳐 주길 간절히 바랐는데, 지금은 의미없는 "네네." 대신에 아주 원초적인 엉뚱한 질문으로 나를 당황시켜서 엉뚱양으로 바꿔 부른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는 지 무엇을 모르는 지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해서 내뱉는 엉뚱한 질문들이다.
그래도 엉뚱하게라도 질문을 한다는 것이 의미없는 네네... 의 연속보다는 무지하게 발전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좋다.
엉뚱양의 점수는 물어 보지 않았다.
[점수보다도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 쌤은 너무 기분이 좋고 응원한다. ] 라고 답문을 보내면서,
시험 준비하느라 수고했다고 오늘은 푹~ 쉬고 크리스마스에는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라고 답장했다.
진심으로, 반은 떨어져나간 손톱끄트머리에 약을 챙겨 바르고 오늘 하루만은 찐으로 긴장감, 시험 걱정따위는 없이,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15세 소녀답게 해맑고 이쁜 웃음이 가득한 날이길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한 시간쯤이 지났다. 꼼꼼양이 살짝 흥분한 문자를 띵똥~ 띵똥~ 연거푸 보내온다.
워~ 워~ 침착해라.
[쌤~]
[아~ 진짜 아까워요~ ]
[1개 틀렸는데요]
[막 풀었는데 시험끝나고 딱 바로 답이 나왔어요 ]
[1분만 더 있으면 다 맞출 수 있었는데 아까워 죽겠어요.]
지난 중간고사에 25-5를 21로 해서 서술형 8점을 하나 날려 먹고 멘붕이 왔던 꼼꼼양에게 다른 풀이과정이 다 맞았으니 부분점수는 받을 꺼라고 걱정말라고 위로했더니, 다음번 시험은 무조건 100점을 맞을 거라고 나한테 오히려 큰소리치던 강단있는 그녀다. 그래서 나는 네가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믿음직하고 어디서라도 제 몫을 야무지게 잘 해내며 살아갈 당찬 15세 소녀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오히려 꼼꼼양의 오빠가, 아직도 그 촛점도 없고 의지가 없는 그 녀석의 눈빛이 어른거려서 걱정이 되는 날에는 꼼꼼양에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오빠의 안부를 수시로 묻곤 한다.
"여전히 오빠는 아무 생각이 없지? 사이버 세계 에서는 좀 벗어나셨는가? " 하면 까르르거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아휴~ 말 마세요. 오빠는 아직 정신차릴려면 멀었어요." 하며 꼭 막내동생 얘기하듯 한숨을 쉰다.
밤 11시가 다 되었나보다. 깨톡, 깨톡, 깨톡... 하는 정신없는 알람음에 눈을 떠보니, 귀요미공주의 캡쳐 사진들이 주르륵 떴다.
[쌤~ 저... 망했어요. 한 문제에 집착하다 그만 쉬운 거를 서 너개나 틀려 버렸어요. ]
문제의 17번 문제를 잠결에 째려본다. 아깝다. 우리 굔쥬양도 y까지는 정확히 풀었는데 x를 구하기가 영 까다로웠나 보다.
찍기도 실력이라 했는데 열정적으로 풀다 보면 가장 근사치에 답이 눈에 띄이고 그렇게 찍는 것은 찍신이 도와줄 거라고 했는데 찍신도 피해갔구나.
시험 전날에 100점에 집착하는 꼼꼼양과 굔쥬양
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100점에 집착하지 말라고. 서술형 바로 앞 전에 한 두 문제는 반드시 100점 방지용 문제로 풀기가 까다로운 문제를 배치하는 너네쌤들 알잖아. 그 문제를 잡고 있느라 배점이 많고 쉬운 서술형을 놓치는 어리석은 짓 따위 하지 말고 체크해두고 넘어 가서 나머지 문제를 완벽히 푼 뒤에 다시 100점 방지용 문제에 집중해도 늦지 않는다고.
지난 번 정기고사에는 꼼꼼양이 100점에 집착
하느라 90점을 가까스로 넘기는 좌절을 맛 보았다. 수학뿐 아니라 대부분 과목이 100점이거나 95점 이상인 꼼꼼양에겐 꽤나 충격이었다. 특히나 요즘은 수학이 가장 자신있어요. 하던 때였다.
아~ 요번에는 굔쥬양이 100점 욕심을 부리다 80점 중반으로 떨어질 판이었다. 다행히 중간고사 성적이 좋아서 점수를 합산하면 A는 받을 테지만 늘 과하게 많이 시켜도 군소리하지 않고 귀엽게 애교부리며 열심히하는 굔쥬양이라서 속이 쓰리다.
나와 함께 한 지는 1년이 채 안 되었지만 처음부터 열정적으로 "시키는 대로 다 할께요." 라는 의지의 눈빛이 참으로 예쁜 아이였다.
때로 엉뚱한 자신감과 공주병으로 굔쥬님~ 하고 불러주면 아기같이 애교를 잔뜩 넣은 목소리로
"선생님, 그러지 마세용~ 저. 놀리시는 거죵? " 하면서도 표정은 전혀 싫어 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그런 관심이 좋은지,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서 더 놀리고 싶은 굔쥬씨다.
85점이라니, 아깝다. 아까워. 정신이 번쩍든다.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욕심이 늘어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 주어진 일들 하나, 하나씩을 그저 최선을 다해 해결해 나가다 보면 원하던 것을 얻게 된다.
그저 한 문제, 한 문제 최선을 다해 정답을 찾아 내겠다는 마음으로 풀다보면 100점이 되는 것이지, 100점을 목표로 조급하게 욕심내서 다 완벽하게 풀어내겠다고 처음부터 끝장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중간 중간에 챙기지 못 하는 것들 투성이가 된다.
중학 수학시험을 내내 100점만 받아 오던 아이가 그랬다. 그 아이에게는 100점 욕심이 딱히 없었다. 그 아이는 그냥 주어진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정답을 찾아 내겠다는 마음으로 풀어 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아이가 내 큰 딸이다. ㅋㅋ 몇 해간 계속 수학 시험을 100점을 맞는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 아이가 더 신기해서 유심히 지켜보았다. 엄마가 수학쌤이라서 수학을 잘 하나보다 하는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겠지만 사실, 그 아이는 나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그냥 묵묵히 자기가 할 것들을 해나가는 그런 아이였다. 100점에 대한 집착도 욕심도 별로 없었다. 그냥 자기가 할 것들을 묵묵히 하다보니 100점이 되어 있는 아이였다. )
그런데 오지랖양은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까? 어디서 또 뺀질거리고 있을 지 연락해보나 마나 고민이 된다. 자기에게 주어진 문제보다 남이 푸는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아서 오지라퍼라 부른다.
네네양에게 같은 문제를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설명해주며 이해했는지 확인하려고 다시 질문하려고 하면 자기가 쏙 대답하는 오지랖양.
"니꺼나 좀 잘 하라고~!!!"
대를 이어 몇 해 전, 오지랖양의 오빠 또한 한 때, 내 혈압도둑으로 불렸다.
이들 남매는 공부를 못하고 실력이 없어서 잔소리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둘 다 영특하고 이해력이 빨라서 분명히 더 잘 할 수 있는데 뺀질뺀질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느라 나한테 늘 잔소리를 들어 먹는다.
오지랖양의 오빠, 내 혈압도둑군이 5학년일 때, 나를 처음 만나던 날에 나에게 했던 말이 나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쌤. 피보나치수열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라고 하던 이 맹랑한 초등학생 녀석을.
가만히 자기꺼 공부하기보다는 논쟁하고 토론하며 이의를 제기하여 얻는 새로운 지식 축척의 기쁨을 알던 예사롭지 않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특출남이 더 오래 반짝일 수 있게 그녀석의 내면에 진짜 실력을 더 야무지게 쌓아 놓길 바라며 잔소리를 해댔다. 예사롭지 않은 네가 예사로운 범주내에서 뛰어난 아이가 되었으면 싶은 욕심이 났다. 여기저기 모나게 논쟁하며 부딪치기를 즐겨하는 네가 더 순탄하게 어우러지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를, 더욱 동그래지도록 다듬어 주면 네가 더 행복해 질 것 같은 순수한 오지랖이었다.
중학교가서 첫 정기고사에서 시험치기 전 날에 하는 직전 보충 수업 때, 수학은 너무 자신이 있으니 보충수업은 하지 않겠다는 녀석에게 샤우팅으로 불러 앉혀다 놓고 100문제를 주며 하나도 틀리지 않으면 가도 좋다고 했다.
다음 날 95점짜리 수학시험지를 들고 신나게 우리집으로 달려오던 너에게 단호하게 과학고를 가겠다는 녀석이 수학이 95점이면 너는 벌써 포기를 해야한다고 모질게 혼구녕을 내었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며 태도가 중하다고 늘 잔소리를 해대었던 그 녀석은 몇 해 뒤에 진짜로 과학고에 입학하는 내 첫 제자가 되었다.
목청껏 잔소리를 해대느라 성대결절이 오려나 싶은 시절이었지만, 진심으로 감사히 너의 찬란할 미래를 응원하며 보냈다.
그런데, 그 혈압도둑의 동생인 오지랖양은 오빠보다 더 강력한 존재였다. 뺀질거리기나 잔머리로나 오빠보다는 확실히 한 수 위이다. 요번에는 마음을 좀 다잡고 공부하는 것 같으시더니 왜 소식이 없을까.
잡으러 가나 마나 잠시 고민해보지만 이미 끝이 난 시험에 급할 것은 없다.
다만 이후에라도 할 수 있는 여러가지 것들 ㅡ 채점을 확인하고 서술형문제에 이의를 신청해서 부분점수를 더 받아내고 하는 그런 야무진 노력들을 전혀 취하지 않고서는 그저 시험이 끝났다고, 시험 전에도 딱히 빡세게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도, 뻔뻔하게 시험이 끝났다고 띵까라빵까라 신나게 즐기고 계실 것이 한 눈에 보여서 얼릉 잔소리 톡을 돌려 봐야겠다.
지난 주에 벌써 시험 끝나고 그 이후에 갑자기 같은 반 친구의 코로나 확진으로 자가격리 중인 우리 쌍남자군은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2주는 된 것 같다. 그래도 간간히 네 누나의 친구를 통해서 소식은 듣고 있단다, 욘석아.
쌍남자군의 누나는 내 큰 아이와 11년째 절친이
면서 한 때 나의 제자이기도 했다.
남매가 어쩜 그렇게 둘 다 똑같이 매사에 의욕이 없고 똑같이 기운 없는 표정으로 공부방으로 들어서지만 그래도 하라는 것은 그럭저럭 또 해내는 녀석들이다.
"곽남매들은 인생에 머 좀 재밌는 일들이 있으까?" 라고 한번은 큰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몰라서 그렇지 재네들 배그에서는 신적인 아이들이야. 그 세계에서 내 목숨은 언제나 곽양에게 달려 있다고"
음식을 씹어 넘기는 것도 귀찮아서 늘 0.5인분도 겨우 먹기 때문에 울 큰 애와 절친이 된 쌍남자군의 누나도 눈을 반짝이며 몰입하는 일이 있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걔는 어떻게 궁금한 게 하나도 없는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저거는 머지? 왜 여기있지? 하면 그런 생각을 왜 하는지, 자잘한 생각을 하는 내가 신기하대. 곽양은... 어떻게 나와 저렇게 다른 지, 나는 정말 알 수없는 아이야." 하면서도 큰 아이는 11년째 된 이 친구와 모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한 달에 최소1회 이상은 만나 주어야 정서적 안정감을 갖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옛 제자의 소식과 현 제자의 소식을 간간히 듣고 있다.
옛 제자는 최근에 길고 긴 방황을 끝내고 공부를 좀 하신단다. 초등 시절만 해도 이 동네 엄친딸로 유명했던 곽양은 우리동네 중학교 배치고사를 만점을 받아 입학식에서 학생 대표로 선서를 했다. 배치고사를 준비시킨 나와 부모님을 동시에 으쓱하게 했던 그런 아이였다.
그 후로 찐한 사춘기 시절을 거치면서 학업에 급격하게 흥미를 잃어 프로게이머의 일상을 살고 있는 아이를, 어머니와 함께 깊이 걱정을 하면서도, 너도 언젠가는 이 방황을 끝내고 네가 갈 길을 잘 찾아 낼 거라 믿는다.
최근에는 쌍남자군의 젠틀한 연애 소식을 전해 들으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물론 그녀석의 사생활은 존중해 주어야 하니까 절대 앞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쌍남자처럼 굴어도 내 눈에는 너무 귀여운 녀석아~ 건강하게 자가격리 끝내고 다시 만나자.
다양하고 참 재미나면서 반짝반짝 예쁜 아이들의 일상을 앞으로 자주 남길 계획이다.
보석같은 모습으로 앞으로 가는 길들이 더 찬란히 빛나기를 바라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소중하게 남겨 둘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