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바바(스포유)
오프닝에서부터 필자는 할 말이 없었다. 이건 그냥 단상이다.
단원고를 단원고라고 부르지도, 세월호를 세월호라고 부르지 못하고 동물, 사랑, 죽음, 꿈을 각각 3분할로 파쇄하고 겹치면서 영화 스스로가 거대한 혼이 되려고 한다.
물론 그 명칭 자체가 반드시 호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스스로 죽음과 동물, 사랑의 단어들을 파쇄하고 겹치면서 관객의 머릿속에 '단원고'와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여 후반부의 비극성을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괴상한 방식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 방식을 조금 더 생각해 보자면 영화 속 엔딩 시퀀스 자체는 결국 살아남은 자, 목격한 자의 소망을 영화가 대신한 것과 다름이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 스스로 피해자의 혼이 되는듯하지만 사실은 살아남은 자의 소망을 대신 실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기이한 현상의 주된 요인은 주인공들의 나래이션이자 고백을 통해 중요한 건 '단원고'나 '세월호'라는 대명사나 집단이 아닌 '너와 나'라고 축소하여 말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태도와 달리 '집단'을 상기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카메라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세월호' '단원고'와 같은 정치적 단어가 되어버린 용어들은 관객의 기억에서 호명되길 기대하고, 관객에게 감정적으로 요동을 칠 수 있는 '사랑해'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말해버림으로써 소재가 지닌 정치성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영화가 정치성을 배제하기 위해 쓴 고도의 전략으로 인해 결국 이 영화의 포지션은 '훔바바'와 같은 전략을 쓴 '변호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상 거대한 침묵인 셈이다.
이 방식에 분노하느냐 수렴하느냐는 결국 관객들의 몫에 달렸다.
필자가 꼭 하고 싶었던 질문.
-메기, 우리들, 우리 집, 남매의 여름밤, 벌새, 그리고 이번 '너와 나'까지 왜 독립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은 이야기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주체성의 한계를 보여주며 끝을 내는가.
- 촌스럽기도 한 장면들이 넘치는 이 영화가 기존의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이유는 혹시 올해 한국 영화들이 평균 이하의 완성도를 계속 보였기 때문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