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잡러의 미술관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눈을 감고 이리저리 뒤척일수록 잠은 더 달아나는 것 같다. 더 자야 또 하루를 버틸 수 있지만 내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진 않는다.
그러자 왜 눈이 떠졌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때문일까?
아니다. 평소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아도 잠만 잘 자는 나 아닌가?
강의가 없고 오후 늦게 병원에 출근해도 되는 스케줄이라 맘 놓고 낮잠을 잤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 안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야 깊은 잠에 들 수 있는데 여유롭던 스케줄로 인해 잉여 에너지가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탈탈 털려야만 잠이 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억울하다.
새벽 3시 나는 어디에 어떻게 내 잉여 에너지를 방출시키고 다시 잠들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무슨 글을 쓸까?
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반복되는 일상은 늘 제자리를 맴돌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하게 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의 일상은 똑같지만 그 반복 속에 아이는 참 쑥쑥 잘 자란다. 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된다. 이 아이의 나이 때 나는 어땠을까? 나의 부모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행복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행복했다고 느꼈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불행에 휩싸여 매일매일 하루가 지옥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견디고 버티는 게 인생이라 여기며 살았던 것 같다. 행복이란 감정을 경험한 것은 아주 아주 한 참 뒤 성인이 되어 정확히 행복이 무엇인가에 관해 내 나름의 의미와 정의를 부여할 수 있게 된 다음부터이다.
나 스스로 행복을 정의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내 것이 아닌 남의 기준을 원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깨진 항아리 같아서 아무리 채워 넣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더 채워져야 하고 더 가져야 더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다고 배우기까지 했으니 현재에 만족을 하면 뒤처지는 사람이 되기 일쑤다. 세상은 여우를 원하지 곰을 원하진 않는다며 욕심을 더 부려야 여우같이 영리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생기는 피로감은 행복한 삶을 위해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인 양 치부하니 행복이란 늘 멀리 잡히지 않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치르고 세계 경제 공황을 다 경험한 Matisse의 그림은 어두움과 두려움 불안 따위는 없다. 그의 그림은 화려한 색을 사용하여 매우 단순한 공간과 물건들에 새로운 생명을 준다. 꽃, 화분, 테이블 위 과일을 그렸던 그는 정말 매일 행복해서 이런 그림을 그렸나 싶다.
수많은 비평가들에게 최악의 작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버려지고 불태워지기까지 했던 그의 작품들을 보며 작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재능을 의심한 적 없을까?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세계의 정세는 불안정하고 예술가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때 어떻게든 악착같이 그림에 매달릴 수 있던 건 그림이 주는 안정과 위로였을까?
어떤 정치 세력의 편에 서지도 않았고 오직 그림에만 집중했던 그는 오직 그림이 주는 행복에 몰두한 사람 같다. 꽃이 주는 기쁨,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주는 평화, 조용한 집안의 공기, 소중한 사람들과 가족, 벽지, 담요, 발가벗고 있지만 창피하지 않은 이들의 춤, 금붕어처럼 당장 내 손이 닿는 곳에서 찾은 행복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래서일까?
Matisse의 그림은 진짜 소확행이 무엇인지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나이를 먹으며 내 나름 행복의 정의를 내리자 그 의미가 닿는 모든 것이 행복으로 다가온다.
커피
그림
아이와 산책
비누
사랑하는 사람들과 수다
과일
90년대 노래
딸기맛 산도
그놈의 조말로 향초
내 손이 닿는 곳에 행복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가 되는 새벽이다.
내 글을 읽는 당신도 손 닿는 곳에 행복을 하나 집어 들길 바라며... 다시 자야겠다.
한 시간 뒤 아이는 학교로 나는 직장으로 출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