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거운게 책임이다.
11월 말이 되면 학교도 병원도 일로 바빠진다. 병원은 올해까지 사용 가능한 보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예약 문의를 한다. 그러다 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원은 환자들로 붐비고 하루 종일 전화벨이 울린다.
학교는 학기 말이 다가오면서 평소 학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학생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학기 끝나기 몇 주 전부터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오고 어떻게든 점수를 올려 보겠다는 마음은 구구절절하고 간절한 변명이 되어 이멜로 보내진다.
엄마는 눈코 뜰세 없이 일 때문에 바쁜데 아이는 곧 생일이라며 설레어한다. 친구들을 몇 명이나 초대할지 무얼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매일 들떠 있는 녀석을 보니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다. 바쁜 가운데 잠을 쪼개며 아이의 생일을 챙겼다. 게다가 월드컵 경기까지 챙겨봐야 했던 내 바쁜 일상은 유행가 가사처럼 24시간이 턱없이 모자란 그런 시간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지난 몇 주를 보냈다.
학기말이 되어 가장 분주한 건 나뿐만은 아니다.
평소 숙제와 시험 그리고 강의 출석에 대충이던 학생들은 똥줄 타는 마음으로 나를 찾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못했던 과제물을 하게 해달라고 하거나 시험을 다시 보게 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움직일만한 신박한 변명을 가져온 사람은 없다.
학기마다 점수를 얻기 위한 변명과 대화는 반복이 되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내 마음을 움직일만한 창의적인 변명을 가져온 학생은 없었다. 자신이 왜 30여 명 가운데 특별대우를 받아가며 이제까지 못 낸 과제와 시험을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변명과 사유는 매우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사유를 바쳐줄 만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과 결정의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어야만 하는 것을 한 학기 학비를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비싼 레슨이다.
책임이라는 무게는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유아 시절은 밥 잘 먹고 똥만 잘 싸도 맡은 바 다하는 기특한 아이로 여겨지지만 점점 나이를 먹으며 책임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생의 궤도에 진입을 한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맞은 바 최선의 책임이라 가르침을 받은 한국 문화에서 공부란 학생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라고 배웠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는 것, 남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 사람을 아끼는 것, 자연과 동물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이 죽는 날까지 가장 최고의 가치를 두고 책임져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는 도덕과 미덕이라는 주제로 다뤄진다.
호박 땡땡이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 Yayoi Kusama는 사실 설치 예술에서 가장 최상의 미적 경험을 하게 만드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은 늘 예상하지 못한 묘한 환상의 순간을 만들어준다. 그녀의 infinity mirror room 시리즈는 특히나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2-3분 동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 안에는 온통 유리로 가득했다. 고요한 방 안에 수백 개의 거울이 나를 비추고 있다. 나는 분명 하나인데 방 안에는 수천 개 아니 수억 개 아니 끝이 없는 내가 있었다.
이렇게 많은 내가 보일 수 있다니.... 그 작은 방 안에 나는 너무 많다 못해 가득 찼고 그 모습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많은 나를 나는 감당 할 수 있을까?"
Yayoi Kusama의 설치 작품은 매우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당신이 내뱉은 말과 행동과 생각과 태도가 이 세상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인스타에서 핫하게 팔릴 최상의 셀카 장소 같아 보였던 Yayoi Kusama의 작품에서 나는 환상이 아닌 현실을 경험하고 그 현실은 두려움이 되어 칼같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나의 존재는 내 주변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책임이란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가장 옳고 바른 행동과 결정으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점수를 얻기 위함이 아니고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함도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책임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과 책임의 무게를 깃털같이 여기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던 인간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존재의 가치는 주변에서 알아봐 준다.
Yayoi Kusama의 작품처럼 나의 존재를 담아 영향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서 말이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는 것
남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
사람을 아끼는 것
자연과 동물을 보호하는 것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얼마나 벅찬 일인가?
하지만, 책임을 지는 존재는 결국 사람을 살리고 주변을 바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