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본인 고등학교 시절 교가도 가물가물해져갈 요즘, 야구팬들이 이름도 처음 들어봤을 일본의 지방 고등학교 교가 첫 줄을 흥얼거리게 될 줄은 몰랐을 것 이다.
고시엔 100년, 관서vs관동, 옛 수도vs현 수도 등, 각종의 타이틀이 붙어 주목을 받았던 교토국제고와 도쿄제일고의 고시엔 결승은,
'한국계' 고등학교 교토국제고의 창단 첫 우승으로 끝이나게 된다.
고시엔에서의 우승은, 아름다운 청춘의 한 페이지로 충분히 장식될만도 하고, '야구선수'라는 삶을 시작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출발이 있을 것 이라고는 일본야구인들에겐 없을 것 이다.
한국도 다를 것은 없다. 그 어떤 대회건, 우승은 그 선수에게 '야구선수'라는 삶에서 윤택한 시작을 제공해주는 엄청난 기회가 된다.
겉은 정말 더 없이 아름답다. 프로에선 볼 수 없지만 또 철 없이 덤벼드는 어린 선수들의 기개와, 고교야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매력들이 고시엔 뿐 아니라 한국 고교야구도 분명 존재하며, 이는 분명 대중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낭만은 무작정 아름다울수만은 없다. 으레 삶이 그렇듯, '낭만'이라는 단어는 무료로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땀 어린 정성이, 때로는 피, 눈물을 흘려가며 쌓은 정성에 대한 가장 최소의 보답이 낭만일 것 이다.
하지만 고교야구에서 '낭만'을 위해 어린 아이들이 과연 피, 땀, 눈물까지 흘려가며 자신의 어린날에 훗날 평생을 가져갈 아픔을 만들고도 실패하는 처절한 경험을 해야하는가. 하는 의문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
이 두가지 상충된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싶어, 오늘의 글을 편다.
낭만을 위한 혹사는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눈물의 왕자' 이형종을 기억하는가?
지금 키움에서 뛰고있는 그 외야수 이형종은 서울고등학교 시절, 지금과 다르게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서울고의 마운드를 이끌며 동시에 4번타자도 맡는, 마치 고시엔의 에이스들이 으레 맡는 것 처럼 '팀'을 어깨에 들쳐업고 대회에 임해야했다.
특히 그 하이라이트는 2007년 대통령배 야구대회. 1회전 130구, 2회전 190구 투구에 이어 결승엔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140구를 뿌리며 팀을 이악물고 9회말 2아웃까지 이끌었으나, 결국 딱 1아웃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져 서울고는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이때 찍힌 사진이 바로 위의 사진.
기뻐하는 광주일고 선수단과 다르게 마운드에서 끝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형종의 모습은, 그를 팬들에게 각인시키고 기대하게 만드는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저 사진의 기쁨과 슬픔, 낭만이 공존함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아픔도 숨겨져 있었는데, 그는 바로 위에서 이야기했던 이형종의 혹사 누적이였다.
그는 당연히 프로에 1차지명으로 입단하게 되었고,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이미 그의 혹사로 너덜너덜해진 팔은 그의 재능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고, 결국 그는 이 부상으로 끊임없이 방황하다가 훗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타자로서 자리잡게 된다.
어린날 팀을 위해 스러져간 이런 선수들을 보면, 점점 구시대적인 야구관에서 벗어나 '투수는 소모품이 아니다'라는 야구관을 가지게 된 야구팬들은 분명한 분노를 느낀다.
'우리나라 야구의 미래를 짊어질 수 있는 선수를 어째서 혹사로 어린나이부터 낙마시키는가'
야구팬들이 분노하며 가장 자주 쓰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혹사는, 일본도 자유롭지 않다. 아니, 어쩌면 일본이 한국보다 더 심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팔은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라는 야구관이 대두되는 일본에서는, '낭만'으로 포장된 에이스의 100구넘는 완투가 기본으로 깔려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프라야 당연히 한국보다 넓지만, 그에 따라 야구하는 학교가 정말 많다보니 한 학교에서 에이스를 2-3명씩 데리고 다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고,
만화에서 보던 에이스의 계속된 완투가 정말로 현실로서 매번 존재한다는 것 이다.
위 사진의 키네 류타로처럼, 팀의 '2번째 투수'는 흔하지 않다.
그렇기에 '헤이세이의 괴물'이라 불렸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2주 6경기동안 767개라는 괴물같은 투구수를, 이후 '손수건 왕자'로 유명한 사이토 유키 또한 7경기 948구를.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이 두 명을 제외하고도 심심치 않게 저정도 던지는 투수들이 많다.
이쯤되면, '왜 그렇게까지 할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친다. 도대체 왜, 무엇이 그리 필요해서 어린아이들의 팔을 갈아가며 승리에 집착해야하는가 라는 의문이, 상식적으로 들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한국과 일본 모두,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가장 먼저 제시되어야할 공통적인 이유는 바로, '팀'때문이다.
당연히 팀을위한 승리 뿐 아니라, 그 에이스의 어깨에 팀원들의 진로에도 명운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이 조금 더 예민한 편이다. 과거부터 한국은 에이스를 통해 고교야구에서 더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다른 선수들도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주목을 받아서 우승 실적을 만든다면, 프로에 가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명문대에 진학하여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에 그치지 않고, 에이스의 입단을 조건으로 같은 고교 다른 선수들의 대학교 진학을 약속해주던 경우도 있었기에 '팀'을 위해서라도 에이스의 혹사는 필수적인 것 이여야만 했다.
일본도 궤는 다를지언정 또 비슷한 느낌이다. 일본은, 모든 선수들이 다 프로를 목표로 고시엔에 참가하지 않는다. 그져 어린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하는 야구청년이라면, 한 번쯤은 고시엔에 진출하여 고시엔의 흙을 퍼오는 것이 목표이기에,
지방 도시 너나 할 것 없이, 프로가 목표건 아니건 할 것 없이 고교야구에 뛰어든다. 그런 와중에 뛰어난 두각을 보이는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는 모두의 피, 땀, 눈물에 대한 보상을 위해 본인의 팔꿈치를 갈아넣어가며 공을 뿌린다.
'어차피 프로에 안가도 되니 추억을 남기자'라는 가스라이팅으로 선수들은 본인의 팔꿈치를 아끼지 않는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선수들의 혹사를 진행한다고 하면, 그것은 과연 정당화가 될 수 있을 것 인가?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본인의 의지가 있었다고 많은 이들이 대답한다. 또 그럴듯한 이유로 볼 수 도 있다. 이유에 대한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닌, 주관적으로 판단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기에.
하지만, 이 혹사의 타당성을 따지기 전에, 어린아이를 '착취, 혹사' 논란의 중심에 서게 시키는 이 책임의 끝이 어디를 향해야하는지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어른이 가져야할 책임감
야구인이기 이전에, '어른'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의 '방관'이 과연 올바른 것 인지 생각하고 책임을 겨눠야할 필요가 있다.
이 혹사 논란과, 고교야구 선수들의 피로는 대부분 어른들의 '방관'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가장 먼저 이야기가 나와야할 투수들의 혹사. 물론 최근 이런저런 규제로 한국에서는 많이 줄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혹사들을 방관하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충암고 투수 박건우는, 2학년 시절 총 149이닝을 소화했다. 어찌보면 프로와도 다름이 없는 수치이다.'
위 문장에서 괴리감이 느껴지는건 한 명의 독자만이 아닐 것 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2학년 시절, 100이닝 이상 소화하는 경우는 고교야구에서 흔하지 않다. 애초 팀의 주축이 되는 투수진은 3학년이다. 박건우가 2학년일 당시, 충암에는 변건우라는 3학년 에이스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혹사논란으로 지명순번이 제일 마지막으로 밀리고,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수술을 받을 만큼 혹사를 당했었는데, 그 한 명의 혹사도 모자라 2학년 박건우마저 149이닝 넘게 소화하게 된 것이다.
이 어린 몸이 감당하기는 당연히 힘들었기때문일까. 이미 148KM까지 찍어봤던 선수가 올해들어 140도 못던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런 와중에도 '관리해준다'라는 인터뷰와 함께 쓸 수 있는 최대한을 끌어다 쓰임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박건우이다.
프로와 다름없는 수치? 공의 회전수, 구속같은 부분이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극찬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소화한 이닝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야구팬들의 표정은 싹 바뀔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이런 비상식적인 기용도 결국 '방관'이라고 볼 수 있다. 선수가 구속도 안나오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쉬게 해주거나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미 직전연도 에이스가 지명순위 맨 끝까지 밀리는걸 봤다면 정말 관리해주는 것이 맞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그것은 '방관'이 맞다.
박건우는 얼마전, 고교통산 200이닝을 넘기게 되었다.
이 칼은 단순히 현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는 야구협회 또한 이 책임에서 피해갈 수 없다.
최근 기록적인 폭염으로 전국민이 고생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프로야구도 폭염취소라는 이례적인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는 와중에, 고교야구만은 낮경기를 강행하고 있다.
고교야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목동야구장의 야간경기가 불가능한 것이 그 이유이다.
이유는 바로 주위 아파트 입주민들의 민원. 6시 경기에 소음이 발생하여 생활에 지장이 간다는 내용의 민원이 2-3명의 인원들에게 지속적으로 들어와 진행이 불가능 하다고 한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애초 2-3명의 민원인들이라면 만나서 얘기라도 해보고자 하던가, 그마저도 해결할 자신이 없다면 다른 구장 대여나 협조 요청을 하여 야간경기를 진행한다고 하면 어느 누가 말릴 것인가?
이마저도 하지 못 할 사연이 있다면, 적절한 '해명'을 꺼낸다면 누가 납득하지 않겠는가?
그마저도 하지못하고 그저 '방관'하고 있는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이 경기가 끝나면 구토까지 해가면서 살아가고 있게 만든다.
이는 일본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본에서 고교선수의 다이닝 투구 및 100구 넘는 투구는, 어찌보면 '당연한'것 일수도 있다. '어깨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라는 지론이 강하게 펼쳐져있는 일본에서는,
이러한 혹사가 일종의 수련이라고 생각하는 야구관이 어느정도 퍼져있다.
그렇기에 타국이나 자국내 소수의 인원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내더라도, 이는 곧 묵살당하거나 그냥 지나가기 일쑤다.
과연 현대사회에서, '어깨에 무리가 가는 행동을 계속하는 것은 오히려 어깨에 도움이 된다'라고 말한다면, 그 어느 누가 동의할 수 있을까?
어깨에 무리가 가는 행동을 자제해야 어깨를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런 '상식'마저도 무시한채로 '훈련법', '야구관'이라고 강요한다면 과연 그것은 '방관'이 아니라고,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볼 수 있을 것 인가.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27년동안 메이저에서 뛴 놀란 라이언 같은 선수가 나올 순 있다. 그러나 모두가 놀란 라이언이 될 수 없으며, 놀란 라이언이 되라고 강요하는것은 더더욱 안된다.'
이 말이 시사하는바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시기이다.
산적해 있는 문제는 단순히 위 두 문제를 제외하고도 많다.
위 두 화두가 가장 큰 것이지, 자잘한 화두까지 모두 말한다면 오늘 이 글은 독자의 밤을 새게 할 수 있을 것 이다.
물론 어떤 학원관련 일이건 간에, 문제가 없을 수 도 없고, 적을 수 도 없다.
하지만 누가봐도, 조금만 상식적으로 접근을 하고, 조금만 노력을 해본다면 우리가 고교야구에서 느껴보는 '낭만'이 조금 더 아프지 않게 빛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순수하게 스포츠를 즐겨야하는 아이들이 어째서 '가스라이팅', '혹사' 따위의 꼬리표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 인가.
돈을 받고 일하는 '프로'여야 하는 사람들이 필드에서 뛰고 있는 '아마추어'선수들의 열정을 오히려 퇴색시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들이 한 일 양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물론 '그것 또한 낭만'이라고 말 한다면, 필자를 포함한 수많은 야구팬들이 할 말은 정말 없어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