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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Mar 05. 2024

나를 웃게 하기 위해

나이 든 여자의 남은 삶 이야기 / 글쓰기

대학 1학년 때 교내 학술제에서 내가 쓴 소설이 장려상을 탔다. 생애 첫 소설이었는데 덜컥 붙고 나니까 나는 내가 완전히 소설 천재인 줄 알았다. 그때부터 나의 꿈은 작가였다. 특히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사실 그 시절에는 작가가 꿈이었다기보다는 당연히 나를 위해 마련돼 있는 자리인 줄 알았다. 즉, 내 인생에서 남아도는 시간이 가장 많았던 시절에 나는 안타깝게도 그 시간을 나의 꿈을 위해 쓰지 못했다. 작가가 되려면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답도 없고 쓸모도 없는 고민들로 인상만 쓰고 살았다. 당시는 특히 박정희 시대 말기여서 나는 온갖 고민들로 뒤죽박죽이 돼 있기도 했다. 경찰 집안이어서 나는 학생운동을 직접 하지도 못하고 이른바 가방모찌만 했는데도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나는 당시 유명 작가들이란 게 전부 천박하고 거만한 인간들로 보였다. 나는 유명 작가들과 그 추종자들이 모이는 술자리에 가끔 참석했는데 한 유명작가는 긴 술상 위의 한쪽 끄트머리에 떡하니 가부좌를 틀고 올라앉아 큰 소리로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곤 했다. 나에겐 그 이야기들이 시시하게 들렸다. 시끄럽기만 했다. 작가가 주장하는 내용보다도 그의 추종자들이 엄숙하게 듣고 있는 모습이 더 불편했다. 나는 실력보다 연줄이 중요한 풍토가 싫었다.


다른 술자리에선 또 다른 유명 작가가 한 후배 여자애를 중간에 데리고 나가 여관방에 갔다 왔다. 그 여자애는 다시는 술자리에 안 나왔다.


나는 당시 또 다른 유명 작가가 하는 월간지를 팔러 다녔는데 영업 수수료를 제 때 주는 법이 없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싸운 뒤 그만두었다.


일련의 사건들이 겹치면서 결국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게 어쩌면 하찮은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웹소설이 없던 당시에는 작가의 수입이 진짜 형편없는 시절이어서 더욱 매력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에게 들러붙은 작가의 꿈을 스스로 털어내지는 못했다. 정말 좋은 글을 읽고 나면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가슴에서 뭉클거리며 올라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척박한 삶은 꾸준히 내 꿈을 깎아먹어 왔다. 생활고에, 애들 키우느라, 엄마 병환에, 또다시 생활고에,... 등등.


그 와중에도 나는 꿈을 이뤄보려고 잠깐씩 노력해 보곤 했었다. 수년간 돈이 좀 모이면 세 달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작품을 썼다. 세 달은 금방 금방 갔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수십 년간 세 개의 소설을 썼고 여러 개의 소설이 시작만 된 채 처박혀 있다. 당연하게도 마음에 드는 글은 한 편도 없다. 참나, 한 문학지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내 친구는 그 작품을 완성하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즉 나의 3개월은 작심 3일 수준이었다.


60세가 넘은 이후 나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는 연습을 해왔다. 내 마음속에서 욕구를 제거하는 연습이었다.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욕심만 내고 있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토리텔링에 재능이 없다.'라고 스스로 핀잔을 주었다. BTS가 되고 싶은 중학생들이 부모한테 학원비를 조르는 모양새와 같다고 나를 비하하면서 내 몸에 남아 있는 꿈의 뿌리를 완전히 캐내버리려고 애써 왔다. 완벽하게 제거하지는 못해서 아마 그동안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써온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내가 작가가 되기는 힘들다는 걸 안다. 정말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고 나는 애독자를 모으기엔 이미 늙었다.


작가의 꿈을 털어내는 일은 거의 다 끝났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며칠 전 엄마에게 내가 화를 많이 냈었다. 97세이신 엄마는 옛날 옛적에 자기가 잘못한 일들을 곱씹으며 자주 훌쩍이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우는 테마는 자기 엄마에 대해 병 구환 한번 못 해 드리고 임종도 못 지킨 걸 괴로워하면서 매일 한 번씩 우는 것이었다. 집에 둘만 사는데 한 사람이 우니까 나까지 우울해지곤 했다. 그래서 화를 냈었다.


"아니, 지나간 일을 자꾸 후회하고 울면 뭐 해, 엄마. 그렇게 울고 나면 죄의식이 좀 사라지나? 내 친구들 중에도 부모 살아계실 때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우는 애들이 있는데 난 듣기 싫어. 진작 잘하지 그랬어? 내 생각에는 이젠 귀찮은 일을 안 해도 되니까 일단 울면서 반성문이나 쓰는 걸로 보여. 울면서 반성하면 자기 잘못이 없어지는 걸로 아는 거야. 울고 나면 좀 후련해지니까 그걸 용서받은 걸로 착각하는 거지. 위선적이라 이거야. 엄마도 그렇게  울게 아니라 다음 생에 태어나면 외할머니를 자식으로 받아서 정말 잘해 줘야지 하고 의욕을 키우는 게 낫지 않겠어? 엄마는 환생을 믿는다며. 그만 좀 울어. 온 집안이 우울해지잖아."


엄마는 내가 말하는 도중에 고개를 가로젓더니 혼자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끌고 일어나 겨우겨우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선 다시 훌쩍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물론 엄마는 내가 한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귀도 어둡거니와 두 문장을 연속해서 말하면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인상을 쓰면서 큰 소리로 떠드니까 뭔가 혼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놈의 입. 미안했다.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면 저렇게 자주 울까? 사실은 엄마가 울고 나서 마음이 진정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인데. 한번 더 참으면 되었을 것을. 바로 뒤따라 들어가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엄마에게 약간 위로를 해 주면서 넘어갈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 내가 매사에 평소 같지가 않았다. 지난 두어 달 동안은 기분이 잔뜩 불어 터져 있었다. 회사 일이 부진해서 돈도 못 벌었고 개인적으로 바쁜 일도 없어서 정말 지루했다. 무협지를 좋아하는데 그것까지 시들했다. 앞으로 어떻게 생활비를 맞출지 매일같이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특히 중요한 것 같은데, 지난해 말, 작가의 꿈을 완전히 접자고 결심하고 나서 더 이상 아무 글도, 브런치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 꿈이 사라지니 목표도 없어지고 일상도 의미 없이 흘러갔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불안에 떨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결국은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엄마한테 화풀이를 한 셈이었다.


글을 쓰기 위한 핑계를 지금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하루하루를 이렇게 지겹게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하루하루를 보람 있는 날로 채워야 한다. 나에게 보람 있는 날이란 유무형의 생산성이 있는 날이다. 돈이 되거나 마음이라도 뿌듯한 날이다. 생산성이 있는 날은 기분이 좋아져서 내 얼굴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 엄마에 대해서도 매사 웃으며 넘기고 음식조차 맛있게 된다.


그것이 중요하다. 어쨌든 내가 웃는다는 거 아닌가. 꿈꾼다고 손해 날 건 없지 않나. 어리석으면 좀 어떤가. 지루한 삶보다는 낫다. 취미생활 중 돈이 제일 안 드는 게 글 쓰는 일이다. 작가의 꿈을 접고 나니 내 글이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해도 그리 원망스러울 것 같지도 않다. 회사 일이 부진하여 돈을 벌지 못한다면, 할 일이 없어서 주리를 트는 날이라면, 글을 쓰자. 목적은? 그냥 뿌듯한 하루를 느끼기 위해 글을 쓰자. 나를 웃게 하기 위해 글을 쓰자. 죽기 직전에 침대에서 읽을거리라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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