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여자의 남은 삶 이야기 / 다시 폐업
재창업 7개월 차였던 올해 초부터 사업을 다시 접어야 하나 고민해 왔다. 올해에는 연간 계약을 해 주겠다던 공공기관에서 작년 말부터 차일피일 미루더니 지난 2월, 결국 다른 업체로 거래를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홍보 인쇄물 발주의 최종 결정권자가 작년에는 기관장이었었는데 올해부턴 기관장 바로 밑에 있는 실무 총괄 장으로 바뀌면서 거래처도 바뀌었다고 한다. 진실은 모른다. 우리 회사가 실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영세업자들은 이런 게 망하는 일이다. 주요 거래처가 빠져나가면 사업은 휘청 한다. 나는 그들이 연간 계약을 해 준다는 말에 최우선 순위로 작업을 해 왔고 가격도 최저가로 제공해 왔지만 이제 와서 그건 우리의 잘못된 전략이었을 뿐, 기관에서 우리 사정을 봐 주진 않는다. 그들은 말하자면 갑이다.
주요 거래처가 없어지니 다른 곳으로 영업을 나간다는 것이 망설여졌다. 사업 자체에 대한 회의가 앞섰다. 영업하다가 운이 기가 막히게 좋아서 누군가 망해나간 자리를 내가 꿰찬다 해도 이익이 그만큼 좋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작년 하반기 결산을 보고 나니 평균 영업이익이 매출 대비 20프로뿐이 안되었었다. 그 안에는 내가 일한 기획료가 포함돼 있으니 실제 회사 이익은 10프로도 안되었다. 기관 예산에 맞춰 주느라 이익 제로였던 케이스, 혹은 일하다 실수가 있어 재 제작을 한 케이스, 혹은 관련 단체에 후원금을 보냄으로써 이익이 제로가 돼버린 일 등 여러 케이스로 인해 실질적인 이익은 회사 대표의 인건비도 못 채웠던 셈이다.
영업이익 20프로일 경우, 회사 이익은 없다 치고, 기획자로서의 내 인건비로 월 200만 원과 운영경비 100만 원이라도 맞추려면 월 1500만 원 이상의 매출이 있어야 한다. 올해 안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의욕이 바닥을 쳤다.
자신감을 갖고 시작했던 재창업을 1년도 안돼 접는다는 것이 속이 상했다. 사실 창피했다. 내가 창업을 했다니까 노인의 거짓으로 보았던 은행 직원의 시각이 사실은 합리적인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달 동안 심리적으로 많이 방황했다.
한편으로는 이럴 때를 대비하여 사무실을 집에서 시작했던 건 다행이다 싶었다. 사무실을 별도로 내지 않은 이유는 운영비에 대한 염려도 있었지만 엄마 때문이기도 했었다. 엄마를 종일 옆에서 돌보려면 사무실이 집과 가까운 데에 있어야 했는데 당시 우리 집은 재개발로 곧 이사를 해야 했다. 어디로 이사할지 몰라서 사무실을 일단 집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무실을 운영 중이었다면 새로운 고정 거래처를 개발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할 것인가. 어쩌면 엄마 덕분에 내가 더 큰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생활은 해야 해서 일단은 알바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회사는 어차피 출판사를 하고 싶어서 만들었으니 폐업은 안 하기로 했다. 또다시 알바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할 게 없었다. 마냥 시간을 흘려보낼 수가 없어서 서울시 50플러스재단에서 제공하는 보람일자리를 신청하기로 했다. 보람일자리는 신청 시기를 놓치면 일 년 내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97세 엄마가 걱정이지만 엄마는 내가 일을 나가면 긴장을 해서인지 몸이 조금 나아지는 경향이 있으니 어떻게든 해나가자 했다.
보람일자리 지역복지사업에 지원했고 합격했고 '우리 동네 키움센터'에 배속되었다. 본격적인 근무를 하기 전 교육 절차를 앞두고 있었다. 이때 또 다른 상황이 발생했다. 나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얘들이 함께 가게를 하자는 거였다. 둘 다 연봉 4~5천 정도 되는 직장에 다니지만 월급만으로는 평생 집 한 칸 살 돈도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부업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내가 물려준 자산이 없으니 지금은 결혼이나 육아는 아예 플랜 절차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직장생활 몇 년에 적금으로 모은 돈은 각자 몇 천만 원씩에 불과했다. 그 돈들을 모으고, 모자라는 건 대출을 받아서 함께 프랜차이즈 가게를 하자는 것이었다. '고생은 젊어서 하자. 목표는 건물주 되기!'
나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다. 이젠 자식들 결정에 따르는 나이가 되었거니와 자기들이 고생을 하겠다는데 나는 인건비나마 조금 줄여줄 생각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면 보람일자리는 관둬야 하나? 관할 구청 담당자에게 문의를 했다. 중간에 그만둘 수는 있다고 했다. 사실 가게를 시작하려면 그전에 프랜차이즈 본사와 인터뷰도 해야 하고 거기서 통과가 돼야 사업을 준비할 수 있으니 시간은 어느 정도 있었다. 인터뷰에 통과가 돼도 두 달에 걸쳐 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최하 네 달은 지나야 본격적으로 가게를 오픈할 수 있는 일정이었다. 그동안은 보람일자리에 나가기로 했다.
현재 매물로 나온 가게 중 하나를 양도양수 하기로 하고 세 명이 함께 현장 실사를 했다. 한 동안 우리 세 식구 단톡방이 시끌시끌했다. 양도양수 대상 가게의 이익 예상표, 계약 조항 검토, 운영 방안, 아르바이트생들 구하기 등등. 제일 많이 등장한 말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들은 한 마디 할 때마다 ㅋㅋㅋ를 습관처럼 쓴다. 우리 애들이 원래 웃음이 많기도 하지만, 원래 모든 일이 기획 단계가 가장 즐거운 법이다.
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엄마가 평생 빚 때문에 고생했는데 너희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니?"
아들이 대답했다.
"난 이거 성공시킬 자신 있어. 걱정 마 엄마."
딸이 말했다.
"솔직히, 우리 아직 20대인데, 20대에 일이 천 날리는 거, 그 정도는 겪어봐도 괜찮지 않아?"
"맞아. 고, 고! ㅋㅋㅋㅋㅋ."
"드랍더빗. 가즈아! ㅋㅋㅋㅋㅋ."
아들과 딸이 최종 선언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달 말 양도양수 계약을 체결했다. 명의는 딸 이름으로 했다. 현재 본사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 가게의 영업 개시 목표는 8월 중.
되새겨보니 지난 두세 달도 쉬지 않고 뭔가를 열심히 했다. 그 와중에 보람일자리 일도 해왔고 1개월이 벌써 지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개인적으로는 성취감이 없고 어영부영 시간만 보낸 느낌이다.
이유는 내가 주도한 시간들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다. 회사는 폐업 전야이고, 알바는 지원할 곳이 없어서 보람일자리로 밀려났고, 우리 집안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려는 가게 일도 이젠 아이들이 주도하고 있다. 아마 내가 이젠 사회에서도 집에서도 주변 인물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드는 의기소침인 듯하다.
진실을 말하면 젊었을 때도 나는 그럴듯하게 산 적이 없다. 나는 인생을 항상 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해 온 것 같은데, 내 인생 여기저기에 아무리 샅샅이 의미의 그물을 치고 훑어보고 거르고 걸러도 올라오는 게 별로 없다. 오로지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렸던 기억밖에 없다. 어쩌다 걸린 것도 다시 보면 작가의 꿈처럼 그저 하찮고 무겁기만 할 뿐이다. 앞으로도 뻔할 게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당황하고 있다.
친구들과 나이 들어 좋은 점을 얘기할 때 한 명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좋다.'라고 했다. 누구는 '막노동이 싫은데 그거 안 해서 좋다.'라고 했다. 나도 이젠 '뭔가 이루기 위해 기를 쓰지 않아도 돼서 마음 편하다. 기를 쓰는 건 이제 아이들이 할 차례다.'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려 해도 여전히 미진하고 내 불안한 마음을 풀어놓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지금도 주도적으로 뭔가를 행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직 내가 늙었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나는 나만의 성취감을 위한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