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는 건 포기했다

나이 든 여자의 남은 삶 이야기 / 부모 돌봄

by 이상은

엄마는 올해로 99세가 되었다. 지난 5년간 엄마는 세상을 곧 하직할 것 같은 고비를 네 번 넘겼다. 최근 두 달간의 고비 때는 진짜 마지막인 줄 알았다.


식사를 거의 못할 뿐만 아니라 침대 위에서도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했다. 몸에는 온통 자반증이 벌겋게 올라오고 가려워서 벅벅 긁곤 했다. 소변 색에는 큰 문제가 없는 듯한데 기저귀에 묻은 소변색은 초록색이었다. 병원에 모시고 갈 작정을 하다가 그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의원에 가봤다.


한의사 얘기로는 엄마의 신장이 극도로 나빠진 것 같다고 했다.


"소변 색이 초록색이라면 다음에는 붉은색이 될 거고 그다음은 검은빛을 띠게 될 텐데 그때가 신장 기능이 멈추는 단계죠."

"그러면 현재 상태로는 병원에 모시고 가서 투석을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지금은 어머니 연세로 보아 투석을 하는 단계를 이미 지났다고 봐야죠. 아마 병원에 가도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 조치도 못 할 겁니다. 원래 노환으로 자연사를 하는 경우 병명을 보면 '다발성 장기부전증'이라고 기록돼요. 몸의 여러 장기가 기능을 하지 못해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거죠. 현재 어머님도 그 과정에 있는 걸로 보입니다. 식사를 잘 못하는 것도 위가 기능을 멈추기 시작했기 때문인 거고요. 이런 걸 우리는 사증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노환으로 자연사하는 분들은 돌아가실 때까지 몸이 아파서 고통을 겪지는 않아요. 병으로 돌아가시는 양반들은 몸이 아프잖아요. 그러니 장기가 기능을 다해가도 그 과정에서 몸이 아프지 않은 건 다행이죠."


나는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지 않기로 하고 한의사한테 소변 배출을 원활하게 하는 약만 받아왔다. 약을 먹인 지 이틀째부터는 자반증도 없어지고 가렵지도 않게 돼서 한시름 놓았었다.


그 외에도 여러 힘든 상황들이 발생했다. 대개는 처음 겪는 일들이어서 주변 여기저기에 물어가며 해결해야 했다. 일주일간 대변을 못 봤는데 병원에 가서 관장을 하려다가 약국에서 좌약을 사 와서 해결했다. 물 없이 머리를 감는 샴푸, 물 없이 하는 목욕제, 기저귀 때문에 생긴 짓무름을 예방하기 위한 파우더 등 각종 환자용품들, 욕창 예방 기기, 비닐 매트 등도 구비를 했다.


엄마는 기억력이 거의 다 무너졌지만 평소의 정신력은 비교적 맑다. 그래서 평소에는 침대 옆에 이동식 변기를 비치해 두고 생활하지만 대변을 볼 때는 꼭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덩치가 나보다 크고 무겁다 보니 내가 부축하기가 힘에 부쳤었다. 특히 침대에서 엄마 몸을 들어 자세를 한번 바꿔주고 나면 나는 허리가 아파서 곧바로 내 방에 와서 눕곤 했다.


결국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하나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집에서 가까운 요양원에 가서 상담을 했다. 당장 빈자리는 없었지만 대기자 명단에 넣어놓으면 연락을 준다기에 엄마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했다.


상담 결과 엄마를 당장 요양원에 보내는 건 망설여졌다. 문제는 여러 가지였다.


요양원 홈페이지를 보면 어디나 환자 개개인의 상황에 맞추어 성심 돌봄을 한다고 쓰여 있지만 그건 어느 정도 환자가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볼 수 있을 때 얘기였다. 요양원에서는 환자 한 명 한 명을 부축해서 화장실에 데려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냥 기저귀를 채운 상태로 침대에서 볼일을 보게 한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엄마를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맑은 정신으로 그걸 견디기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당시 엄마는 식사를 혼자 못했었다. 자기 손으로 음식을 떠서 입까지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한 숟갈씩 떠서 먹이고 있었다. 혹은 반찬 없이 먹을 수 있는 죽을 만들어 빨대로 먹였다. 내 생각에 엄마가 하루 한 끼 이상은 그래도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요양원에서는 환자마다 밥을 먹여줄 수는 없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면회는 일주일에 한 번뿐이 안된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일하러 나가면 요양보호사가 와 있는데도 몇 시간 내내 시계를 보며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내가 집에 들어서면 보고 싶었다며 눈물을 글썽일 때도 있다. 일주 1회 면회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좀 더 집에서 모셔 보기로 했다. 요양원의 대기자 명단에는 올려놓았다. 하지만 엄마한테는 다짐을 해뒀다.


"엄마, 요양원에 가지 말고 우리 할 수 있는 데까지 집에서 버텨보자."

"응. 나 요양원에 가기 싫어."

"그러려면 엄마가 날 좀 도와줘야 해. 내가 엄마 기저귀 갈아줄 때 엄마가 허리를 들어주고 그래야 해. 알았지?"


그 후로 엄마는 애를 쓰면서 나한테 협조했다. 식사도 열심히 먹으려 했다. 나는 마트에서 파는 죽을 여러 종류 구비해 놓았다. 요즘에는 시중에서 파는 죽도 맛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영양죽이라고 만든 것들을 더 열심히 먹었다. 영양죽에 계란 노른자를 생으로 풀어 주면 잘 먹었다. 집에서 만든 죽 중에서는 녹두죽에 잣죽과 흑임자죽을 조금씩 섞고 찐 밤도 몇 알 갈아 넣은 걸 고소하다며 제일 잘 먹었다. 팥죽도 집에서 쒔는데 잘 먹었다. 아침저녁으로는 내가 그런 식으로 영양죽과 마트 죽을 먹이고 낮에는 요양보호사가 와서 누룽지를 끓여서 다시 으깬 누룽지 죽을 두부나 생선을 반찬으로 해서 먹였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지금 엄마의 몸은 두 달 전으로 돌아가 있다. 이젠 죽보다 밥을 더 잘 먹고 거실에 나와서 느리지만 자기 손으로 먹는다.


반면 뇌는 쪼그라든 상태에서 다시 되돌리지 못하는 것 같다. 나의 두 아이를 자기 언니 자식들이냐고 하루에도 열 번씩 물어본다. 기억력이 계속 소실되고 있다.


단기기억상실증도 심각하다. 엄마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는데 1분에 한 번씩 본다. 1분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건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데 기억이 또렷하다면 그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견디겠나. 엄마의 끊임없이 반복하는 똑같은 질문에도 그런가 보다 하고 다정한 말로 성의껏 대답해 주는 방법뿐이 없다.


아쉬운 점이라면 나의 노력과 애씀을 엄마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 모르니 내가 생색을 낼 수가 없다. 뭔가 보람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가 딸의 인생을 잡고 놓지 않고 있다는 걸 매 순간 자각한다면, 그래서 자신이 딸을 힘들게 한다는 걸 계속 곱씹게 되면 그거야말로 얼마나 고통일까. 얼마나 자괴감이 들까. 괴로움에 떠는 엄마를 보는 나는 또 얼마나 갑갑할까. 그렇지 않으니 그나마 서로 웃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 가며 가능한 한 오래 집에서 엄마를 모셔 보기로 최종 결정했다. '나중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해 보자. 나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엄마가 완전히 넋을 놓아서 나조차 알아보지 못할 때까지는 모셔보자'라고 결심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족가게 주주회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