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골 소녀에서 미국대학교 교육학 박사 학위 취득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상에 이미 영어 공부 비법에 관한 글이며 동영상이 널리고 널렸는데, 구지 나의 경험을 그 산더미위에 보태고 싶은가?’ 나 자신을 향한 회의에 가득 찬 질문이 생겼다.
하지만, 나의 경험이 나에게는 유일한 것이고 어쩌면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늦기 전에 공유하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답을 해본다. 어쩌면 이 글들이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남에게 결국 필요 없는 괜한 꼰대 같은 조언으로 전락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글은 적어도 나의 지난 시간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영어 공부법에 대한 글을 쓰려한다.
❚운이라고는 없는 아이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그 무엇 하나도 나는 가지지 못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최고 산골로 명성이 날 만큼 그런 깊은 산골 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난 다섯 명 중 존재감이 없는 둘째 딸이었다. 당연히 조기 영어 교육이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엄마를 둔 나로서는 엄마표 영어같은 것은 꿈에도 없는 말이었다. 중학교 입학해서 처음으로 영어 알파벳을 배웠다. 중2때 인근 대도시로 홀로 유학을 나온 이후부터 나는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영어 포기자였다. 그런데, 나의 현재 직업은 현직 영어 교사이다. 그리고 어찌 어찌하여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고 영어 교육 석사 학위와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포자’였던 영어교사
뭔가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나의 전력에서 예견이 되겠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교 시절동안 영어 좀 하는 사람이면 다들 해봄직한 영어 공부 방법들을 다 해본 사람이다. 그냥 해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미친 듯이 해본 사람이다. ‘영포자(영어 포기자)’였으나 영어 교사가 된 사람이라 나는 영어를 못하는 학생들의 마음이 아주 잘 이해가 된다. 그게 영어 교사로서 내가 가진 장점이라 장담한다. 그리고 국내에서 영어 공부해도 충분하다며 늘 떠벌리곤 했었다.
❚순수 국내파에서 유학파로 변신
그렇게 순수 국내파 영어쟁이만을 고집하다가 뒤늦게 40세 늦은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나 해외파로 둔갑한 사람이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게임이다. 돈이 있어야 갈 수 있는 유학이라 생각하며 나는 아예 토플 공부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었다. 돈이 없었기에 마음조차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돈은 없지만 인생 경험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의 5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한 뚝심의 대한민국 아줌마이기도 하다.
❚영어에 관한 파란만장한 경험 소지자
아직도 원어민들이 하는 영어 근처에도 못 가는 만연 영어 학습자이지만 나름 영어에 관한한 미쳐 본 적이 있는 현직 영어 교사이다. 장담컨대, 현직 영어교사 중에 나만큼 영어에 관한 파란 만장한 경험을 보유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직장으로 여겨지는 공무원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까지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난 이제 평생 영어 공부를 즐기며 할 자신이 있는 ‘영어에 미친 영어쟁이’가 되었다. ‘딴 나라 말을 그렇게 할 이유가 있을까’하겠지만, 나에게 영어는 딴 나라 말이 아니라 세계 공용어이기에 그렇게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믿는다.
❚갈팡질팡한 흔적들
먼 길을 돌아와서 뒤를 돌아보니, 나의 영어 공부 방랑기는 이리 저리 갈팡질팡한 흔적들로 가득하다.
그 수많은 교과서 지문을 통째로 달달 외우기가 강요된 중학교 영어 시간,
뭐가 뭔지 모르는 문법을 그저 공식 외듯이 했던 그 따분한 영어 수업,
외워도 외워도 자꾸 까먹는 영어단어 공부,
퍼즐 맞추듯이 꾸역꾸역 해대던 영어 독해공부,
막힌 말문과 귀를 트려고 알바해서 번 돈을 영어 회화학원에 바친 대학생 시절,
이른 아침 어김없이 듣던 영어 방송,
원어민처럼 발음하려 애썼던 쉐도잉 연습,
수많은 영어 표현 노트 정리 그리고 암기
영어 교사가 되려고 영어 공부와 담을 쌓던 시절.
(보충 설명: 그 당시 영어교사 임용 시험은 영어 능력 시험과 거리가 멀었던 시절이었다.
영어도 못하면서 영어를 어떻게 가르칠 건지 공부하는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구지 그러고 싶었다.
나는 영어 교사 치고는 영어공부 열심히 한 영어 교사라 스스로 자부하며 만족했다. 하지만, 수년간 한 영어 공부가 그저 학생들의 퍼즐 맞추는 시험에 받쳐지는 게 싫었다. 그리고 영어를 사용해보고 싶었다. 그 문화를 제대로 알고 그 언어를 이해하고 싶어졌다. 몸으로 부딪히면서 경험하고 싶었다.
미국 유학 기간 동안, 내 능력 이상의 영어를 요구 받았다. 의사소통을 위한 생활 영어와 학문분야에서 쓰이는 영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어는 단지 단어, 문법, 독해, 좋은 발음으로 말하기가 다가 아니었다. 그 일차원적인 선상 뒤에는 입체적인 기둥들이 빼곡히 들어 서 있었다.
❚영어와 맺은 깊은 인연
영어는 그렇게 나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영어를 한 덕분에 아주 깊은 산골, 흙수저를 쥐고 태어난 소녀가 넓은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30년에 걸친 영어 공부 시간을 통해 나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영어 공부를 하려면 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런 나의 다양한 배움의 과정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연재하게 될 저의 글들을 통해 여러분과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