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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Feb 08. 2023

칸딘스키의 <즉흥 협곡>

세기말을 지나 1차 세계대전을 앞둔 혼란과 불안은 약속된 주제인양 모든 영역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가공된다. 1910년경부터 칸딘스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 기독교의 묵시록적 테마도 이러한 현상의 한 줄기이다. 알다시피 ‘묵시록’은 난해하다. 이미 성경의 해석부터 여러 갈레인데 하물며 계시가 담긴 메시지야 두말하면 잔소리이리라. 이를 대변하듯 그림의 구도 또한 못지않게 혼잡하다. 앞뒤 좌우의 방향도 없고, 강약의 조절도 없다. 모든 게 한꺼번에 등장하여 제각기 제 말하기에 여념이 없다. 



모든 성인의 날 1, 1911


<모든 성인의 날 1>에서 눈에 띄는 건 나팔 부는 천사와 성인 성녀이다. 러시아의 수호성인 성 조지는 언제나 방패를 들고 백마 탄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 조지 옆에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은 러시아의 수호 성녀 블라디미르이다. 그 옆에 어깨동무를 한 초록색과 흰색의 옷을 입은 성자들은 그리스 정교회의 최초 순교자 성 보리스와 성 글렙이거나 바이에른 사람들이 숭배하는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안으로 추측다. 이들 오른편에 슬퍼하며 비탄에 빠진 세 사람이 보인다. 아래편에는 검은색으로 묘사된 수도승의 주검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상단 왼편에는 모스크바를 연상하게 하는 도시가 보이고 태양이 그 뒤에서 빛난다. 검은 달은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어둠을 뚫고 나타난다. 이들의 가운데에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천사의 최후심판, 1911


<천사의 최후심판>은 <모든 성인의 날 I>을 거의 완벽하게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형상이 뭉개졌다는 특성이 있다. 만약 전자의 그림이 없다면 우리가 쉽게 이해 못 할 것들이 있는데 이보다 중요한 건 칸딘스키가 어떤 식으로 형태를 분해해 나아갔는지 살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모든 성인의 날 2, 1911


<모든 성인의 날 2>는 물론 <모든 성인의 날 1>을 기초로 한다. 이 또한 복잡한 구성으로 묵시록적인 장면이 연출되는데 화면 중앙에 나란히 서 있는 세 명의 성자는 성바실리우스, 성 그레고리우스,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이다. 이들 아래에 노란색 옷을 입은 여인은 바이에른의 수호 성녀 발부르가이고, 뒤편에 팔을 들고 있는 성녀 블라디미르도 봉헌된 촛불과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의 요나 이야기를 불러오는 고래와 배, 황금마차를 타고 승천하는 엘리야, ‘묵시록’의 저자 성 요한이 트럼펫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광경, 나팔 부는 천사 등이 서로 섞이고 엉겨 있다. 


이러한 그림의 내용과 구도는 이 즈음에 완성된 칸딘스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말 탄 사람, 언덕 위의 러시아풍 도시, 언덕과 산 그리고 강물과 바다 등은 칸딘스키의 주요 그림 소재이다. 하지만 이 대상들은 그가 추상에 도달하면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실제 사라진 건 아니다. 모든 대상은 배후에 살아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를 기억하고 그의 그림을 관람하면 대상들의 소용돌이, 서로 부딪치고 흩어지는 감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흥 협곡, 1914


<즉흥 협곡>의 중앙 아래에 나란히 서 있는, 바이에른 민속의상 차림의 한 쌍은 다름 아닌 칸딘스키 자신과 그의 동반자 가브리엘 뮌터이다. 이들이 서 있는 다리 아래에 두 척의 카누가 보이는데 살짝 뒤집힌 듯 공중으로 치솟은 노가 편치 않은 상황을 이야기해 준다. 계곡의 물살은 잔잔한 호수에서 오른편 폭포를 만나면 급류로 변한다. 요소요소에 자리한 건물, 정교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철로, 구름, 산, 하늘 등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칸딘스키와 뮌터는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다. 이들 앞에 놓인 문제가 한둘이 아니어 보인다. 



칸딘스키가 살았던 시대에서 100년을 훌쩍 넘어선 오늘, 세기말을 지나 이천 년대의 어느 날인 오늘, 역사는 되풀이되어 재현된다는 생각에 확신이 든다. 뒤엉킴, 칸딘스키의 그림은 엉겨 붙은 실타래 같다. 출구 찾기가 어려운 묵시록처럼 암울하다. 심판의 날이 오면 살아날 자가 없다는 은밀한 협박의 효과는 무얼까?


2월, 기독교의 절기로 사순이 다가온다. 쌉쌀한 봄날씨처럼 불친절한 묵시록이 독서로 읽힐 것이고, 무턱대고 회개하라고 외칠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실질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사제들도 잘 모르나 보다. 본질은 건드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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