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에서 위로를 얻는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구경하며 그 무리에 쉽게 섞이지 못하는 스스로를 창피스럽게 여겼다. 궁여지책으로 동화책을 끼고 살았던 나는 책 속에서 나름의 피신처를 만들 수 있었다. 엉거주춤 혼자 있는 게 아니라 독서 중이라는 합리화는 퍽 괜찮은 해결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무리 지어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어디에 끼지 못해 부러울리는 없고, 그보다 혼자 있는 나에게 드리워질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던 거다.
나는 내 모습을 숨기려고 매사에 무심한 척했던 외톨이에 가까운 말없는 아이였다. 이따금씩 올려다본 하늘에는 언제나 구름이 피어올랐고,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빼곡히 심긴 갖가지 꽃과 뒷동산의 나무들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내 마음을 채워 주었다. 나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노래하며 그 풍광을 만끽하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관계 맺기에 실패한 내 모습도 찬란할 수 있다는 걸, 그 진리를 알고 있었던 걸까?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여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관계의 어지러움은 유년기를 지루하게 만들었지만 색다른 경험과 시선을 안겨 주었다. 인간관계는 자연처럼 균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양보를 또 하나의 축으로 여긴다. 지속 가능해야 할 삶의 바탕에서 관계의 힘은 저돌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관계에 저당 잡히곤 한다.
관계는 다름과 관심에서 시작된다. 너와 내가 다르거나 같기 때문에 연결된 거다. 그러나 나는 너를 알아볼 수 없고, 알아낼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나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과연 누구인지 알아보는 건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를 안다면, 이를 발판으로 내가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래에 읽은 <서양 철학사>의 한 편을 공유하고 싶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한다는 건 우리가 속해 살아가는 관계들과 연관들까지 모두 이해한다는 걸 포함하는 거라고 했다. 자신을 전체 속에서 한 상황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라는 말이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파악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