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날씨다. 실은 그렇게까지 춥진 않았지만 방심한 채 얇은 옷만을 대충 걸친 스스로에 대한 어리석음이 묻은 표현이기도 하다. 추위는 아주 느긋한 척 먼발치에 떨어져 있다가도 한 번씩 급작스럽게 코 앞까지 다가와 콧물을 훔친다. 그것이 자연스러움 이겠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직은 어린 내 마음이겠지. 해가 막 올라오며 푸르스름해지는 시간이지만, 따스함을 기대할 순 없다. 그저 어깨만 움츠러든다.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치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며 느긋해진다. 낮과 밤이 뒤집혀 생활하는 내가 부리는 시답잖은 사치 중 하나이다. 탁해진 노란빛으로 뒹구는 낙엽들만 나와 비슷한 처지다.
항온동물. 여름이라고 시원해지지 않고 겨울이라고 따듯해지지 않는다. 어느 상황에서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에 찬바람이 체온을 훔쳐가는 시기엔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괜스레 다가오는 헛헛함이 낯설다. 아무리 의식하지 않아도 불쑥 찾아오는 것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추위에 빼앗긴 빈 공간을 채우고 싶어 엄한 너를 떠올리는 게 여전히 미련하다는 사실만 깨닫게 해 준다. 눈에 보인들, 너와의 거리는 여전할 텐데 말이다. 아주 긴 시간을 거쳐 겨우 털어낸 멍청함은 새로운 것으로 치환되어 처음인양 으스댄다. 같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지만, 그만치 느끼려고 하진 않는다. 애써 부정한다.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갖지 않으려 한다. 갖지 못하기에 이유를 만든다. 그 이유는 너무나 견고해 나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목적을 잃은 그것들은 주위에서 맴돌다 녹아 흘러 오히려 해자로 변해버린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그리고 나갈 수도 없게끔.
백 미터,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멀리. 나의 눈은 초점을 잡는 능력이 형편없어져 안경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존재의 이유를 유지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쩌면 사람인지 쓰레기 더미인지조차 명확히 볼 수는 없는데도 너란 걸 안다. 알아진다. 테두리가 명확하지 못한 실루엣을 보고도 그렇게 확신하는 것은 왜일까. 그렇게 믿는 것일지도. 크게 소리를 쳐 불러야 하나,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은 찰나였고 나는 그저 바라봤다. 몇 초의 눈 맞춤이 다시 얼마나 나를 밑으로 끌고 갈지 감당하기 힘들걸 알기에 참아냈다. 너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게, 그러나 시야에서 놓칠 수도 없게끔. 딱 그 정도의 속도로 걸었다.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추위에 집중한다. 나의 얇은 옷을 탓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너의 옷이 걱정스러웠다. 좀 더 두꺼운 옷을 입고 나왔어야지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나마 목도리를 두른 것이 작은 안심이다. 차 밑에 웅크린 새끼고양이들이 걱정스러운 것과는 다른 감정일까. 모르겠다. 갑자기 니가 뒤돌아본다. 놀란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아무 생각 없이 널 보고 있다. 나만치 눈이 안 좋은 너일 텐데 용케 알아보고 인사를 하고 있다. 거울에 비춘 것처럼 너를 따라 손을 흔들지만 주머니에 넣어둔 손은 빠지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못한다. 내가 마주 인사한 것을 알아봤을까. 잘못 봤다고 여겼을 수도 있고, 내가 무시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몰아쳤고 그동안 나는 잠시 찬바람을 무시하고 있었다.
"밖에 날씨 추워. 옷 따듯하게 입고 나가"
엄마의 충고로 옷장을 열어본다. 노란 털 목도리는 고이 개여져 가장 위쪽에 놓여있다. 손에 닿은 목도리의 감촉이 이미 나를 데운다. 두르면 따듯하겠지만, 그만큼 허하겠지. 다시 손을 떼고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다. 일단은 그렇게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