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규와 고구마 소주로 마무리하는 여행지에서의 하루가 만족스러웠다. 지갑을 숙소에 두고 온 것을 깨닫기 전까진 그러했다.
"죄송한데 제가 지갑을 두고 와서요. 혹시 핸드폰을 맡기고 얼른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혹시나 안된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인상 좋은 사장님은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숙소까지 거리가 꽤 되었기에 길을 확인할 유일한 수단인 핸드폰이 없는 것은 불안했지만, 길은 잘 외우는 편이었다. 대강의 방향과 무의식적으로 봐오던 건물, 간판들을 떠올리며 지갑을 찾으러 향했다. 10분 정도 걷자 자그만 공원이 나왔다.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의 분위기를 위해 일루미네이션을 장식해 뒀다. 군청색, 진보라색, 노란색, 빨간색, 녹색. 애매한 색조합이었다. 담당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미적감각이 형편없는 공무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색을 입힌 빛을 발하는 조명들의 군집체가 각각의 철골 구조물을 감싸며 형태를 갖추었고, 찬바람과 적당한 눈나림이 마무리를 짓는다. 그것을 바라본 나의 감상은 한마디로 '촌스럽다'였다. 묘하게 지방색을 띄고 있다. 그곳의 조명만 특별하게 다른 것을 쓰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편견일까 싶어 한참을 바라봤지만 처음의 감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더 세세하게 뜯어보고 싶었지만 아직 식당의 채무가 남아있었기에 서둘러 발을 옮겼다.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무줄기를 따라 노란색 등이 감싸져 있다. 판타지세계엔 왠지 실존할 법한 생김새다. 기본적인 형태의 장식이지만 가장 깔끔하다. 새벽마다 판교역에 오면 그 일루미네이션을 보고 마음이 일렁인다. 각진 도로와 건물들 사이로 유일하게 자연적인 형태의 선을 느낄 수 있다. 지나는 사람도 없고 차도 없다. 비어버린 도시는 황량함을 더욱 증폭시킨다. 한두 시간만 지나도 금세 바글바글 거리겠지만 적어도 내가 들르는 그 순간엔 고요하다. 그 나무도 결국은 만들어진 인공물이나 다름없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있어주길 바란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수많은 교회들이 콘테스트를 펼친다. 어느 때부턴지 규모가 조금씩 축소되어 아쉽지만, 여전히 화려한 곳들도 많이 남아있다. 동네의 작은 개척교회들부터 도심 한가운데에 거대하게 서있는 대형교회들까지 각각 자신들의 일루미네이션을 장식한다. 예수님은 별빛만 반짝이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이젠 눈앞에서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들의 일루미네이션을 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본 것들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소란스럽다'는 것이다. 대체로 세 가지 이상의 색을 사용하며 배열을 자유롭게 한다. 커다란 기준선이 부재한 상태로 각각이 따로 존재한다. 아무리 고요한 새벽시간이어도 조용한 느낌은 없다. 신나는 날을 표현한 것이라면 완벽한 방법이긴 하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가 그것들을 소란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비교대상 때문일 수도 있다. 석가탄신일의 연등은 무규칙적인 색의 조합이지만, 배치를 질서롭게 해서인지 차분한 느낌이다. 등 자체가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갓을 씌운 등처럼 은은하게 발하는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초파일이 다가오면 도로에 연등이 달린다. 운전 중임에도 정적인 감각에 둘러싸인다.
매년 겨울이 오면 빼놓지 않고 남대문에 들른다. 남대문시장부터 신세계 본점. 명동 거리를 걷고 남산이 보인다. 가장 세련된 일루미네이션을 전시하는 곳이며 예전 한국은행 본점과 새로 지은 우체국 빌딩이 괴리감을 준다. 청동 분수는 들여다볼수록 세월의 바래짐이 느껴지고, 그 뒤로 비추는 시장은 매우 분주하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다양한 외국인들과 나 같이 구경 나온 한국인들도 섞여있다. 눈에 들어온 모든 풍경이 익숙함과 이질감을 함께 준다. 그곳의 일루미네이션은 단순한 조명만이 아닌, 모든 풍경을 포함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이다.
다행히 지갑은 숙소에 있었다. 혹시나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것일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주머니 깊숙이 지갑을 챙기고 다시 식당으로 향한다. 의도치 않았지만 식후 소화운동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 와본 낯선 동네는 여전히 낯설었다. 왔던 그대로 돌아가는 단순한 길이지만 반대서 바라보는 건물의 모습이 어색했다. 아까 봤던 간판이 저게 맞았나? 의구심을 가진채 발을 딛는다. 그렇게 나아가다 눈에 들어온 것은 아까 봤던 일루미네이션. 촌스러운 일루미네이션. 처음 온 동네에 낯선 거리에서 반가움을 느낀다. 그리고 전보단 촌스러움이 덜 해졌다.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서였을까, 신기했다. 그곳부터 식당까진 길이 쉬웠다. 걱정을 내려두고 가볍게 식당으로 향했다. 계산부터 하고 돌아와 좀 더 여유롭게 감상하기로 마음먹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