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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풍가도 Nov 21. 2024

따뜻한 봄날엔 낮잠을 자고 싶다.(6)

#6. 저도 한 손 거들겠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상대방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말이다. 

사실 상대방에게 나의 도움이 어떻게 좋을지는 생각을 많이 해보지는 않았다. 왠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언가 실례가 되는 행동 같기도 하고 뭔가가 그랬다. 

하지만 확실히 나에게는 좋은 일임은 확신한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기부를 꾸준하게 하고 있다. 

아 너무 오해는 마시라. 그리 거창한 기부는 아니니깐. 뉴스나 신문에서 나오는 어디 회장님처럼 통 큰 기부를 상상한다면 나도 민망하다. 꾸준함에 포인트를 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칸트 형님의 정언명제에 따른다면 내 기부는 선한 행동은 아닌 듯하다. 100퍼센트까지는 아니지만 어찌 보면 내가 기분 좋자고 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래도 뭐 칸트 형님은 벌써 돌아가셨잖아? 



         

나의 첫 기부는 아마 내가 32살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당시의 내 상황을 잠시 설명하자면 아주, 아주아주 삶이 난장판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삶이었고 금전적으로 빚도 많았다. 

엄마의 간곡한 부탁 아닌 부탁으로 교회를 나가면서 철딱서니 없는 생활을 정리하고 새롭게 살아보려고 마음먹은 상황이었지만 현실은 참 팍팍했다. 넉넉지 않은 월급을 받으면서 빚까지 갚아 나가는 상황이었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언가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샘, 저희 이번에 시험도 잘 봤는데 치킨 사주시면 안 돼요?”

학원에서 수업하던 학생 중 한 명이 말한다. 눈치도 없이...

“야, 샘도 치킨이 참 먹고 싶다.”

당시 내 1주일 용돈은 단돈 만원. 내가 먹을 치킨도 없는데 무슨 수로 너네를 사주겠냐...  

   

이런 팍팍한 삶을 살아가던 나에게 교회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조금은 세속적인 목적이 더 컸던 나지만 그래도 당시엔 새벽예배도 나가면서 많은 힘을 얻었다. 물론 지금은 또 게을러졌지만 말이다.

하루는 새벽예배 때 목사님 설교 말씀 중 ‘사명’이라는 말이 갑자기 나에게 훅 들어왔다. ‘사명’이라는 단어가 조금 종교적이라면 그냥 목표와 같은 말이다. 내 삶의 목표라...

그래서 그날 집에 와서 생각을 해 봤다. 

‘나의 사명은 무엇일까? 나는 무슨 목적으로 삶을 살아가는가? 나는 어떻게 살면 보람이 느낄까?’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대학 때 참 선배들이 멋져 보인 적이 있었다. 그중 특히 내가 반했던 선배들은 당시 밤에는 야학을 하고 낮에는 재개발 등 철거지역에 가서 철거민들을 돕는 그런 선배들이었다.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뭔가 위험하면서도 멋져 보였다. 용기가 없는 나에겐 그런 선배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뿌듯하고 벅찬 느낌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도 누군가를 돕고 살고 싶다고. 당시엔 내가 경제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여서 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앞에서 나서서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 수줍음도 많고 용기도 없었으니까. 많은 고민을 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 나같이 용기 없는 이에게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은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곧바로 ‘월드비전’에 전화를 걸고 상담원과 이것저것 상의한 후 아동 한 명을 후원하기로 했다. 

이게 내 기부의 시작이었다.     




이년 전쯤 ‘월드비전’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열어보니 후원 10년을 축하하는 카드와 뭐 이것저것이 들어 있었다. 이젠 벌써 후원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 


나는 그동안 해마다 1명씩 후원 아동을 늘려가며 지금은 10명이 넘는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하지만 웃기게도 매년 1월이 되어 전화를 걸어 후원 한 명을 늘리는 통화를 할 때는 그때마다 아직도 소심하게 해외아동과 국내아동을 항상 고민을 한다. (참고로 국내아동은 5만 원, 해외아동은 3만 원이다...)


또 몇 해 전부터는 내가 사는 곳의 ‘지역사회보장협의체’라는 곳에 들어가 뭐라도 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다른 분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되지만 그래도 나름 보람을 느낀 적이 있다. 가끔 김치도 담그고 어르신들 말동무도 해드리는데 솔직하게 많이 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직업이 학생들을 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한부모 가정이나 저소득층 가정에 1년에 두어 번씩 작게나마 장학금도 전달하고 있다. 

적고 보니 참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조그마한 내 마음의 실천일 뿐이다.


자랑하는 것 아니냐고? 

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건 좀 자랑해도 괜찮지 않나? 

내가 이런 걸 자랑함으로 혹여 다른 누군가가 


‘응? 기부란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였어?’ 


‘오, 그래? 남들 돕는 게 재미가 있단 말이지?’ 


하며 누군가를 돕기 시작한다면 전체적으로는 사회에 이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이렇게 나는 기부를 통해 내 삶의 목적 달성과 살아가는 기쁨을 충족시키는 중이다. 

하지만 이 길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가장 큰 난관은 주변의 말림(?)이 제일 나를 힘들게 했다.

특히 후원이나 기부를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지금은 때가 아니야. 좀 더 네가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해도 늦지 않아.’ 


‘기부 단체들 다 비리투성이인 거 뉴스에 나오잖아’


‘너 먹고살기도 바쁜데 그거 가식 아니야?’ 


등의 말들이 참 나를 힘들게 했다. 더욱이 이런 말들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했던 말이라 더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 지금 미룬다면 나중에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부의 사례로 전체를 매도하지는 마. 그리고 내 도움의 1%라도 전해진다면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가식이라 해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한테 피해 가는 거 아니잖아?”


그래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말싸움을 하기도 했고 가끔은 결심이 흔들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쌓이다 보니 주변 사람들도 그러려니 인정을 해준다. 특히 처음에 반대가 심했던 우리 엄마... 못난 아들 걱정하느라 한동안 나를 힘들게 하셨지만 지금은 후원 아동들 사진도 잘 챙겨서 내 방 액자에 걸어놔 주시곤 하신다.     




며칠 전 운영하는 학원에 누군가가 찾아오셨다. 


‘월드비전’에서 나오신 분인데 저소득층 급식지원 후원 외부 영업을 하시는 분이셨다.

 

“원장님, 좋은 일 하신다 생각하시고 후원 한번 해 주세요.”


“아... 선생님, 제가 지금도 몇 명을 하고 있어서 좀...”


“아이고, 좋은 일 많이 하시네. 원래 좋은 일은 하는 사람이 더 하는 거예요. 아시면서” 하시며 종이를 스윽 내미셨다.


“아... 그렇죠... 네...”


이렇게 또 나의 후원계좌에는 한 구좌가 추가가 되었다...      

    

얼마 전 안나 프랑크의 일기를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네의 일기’라고 번역되어 나온 책이다. 

나치독일시대 유대인의 삶을 적은 일기인데 거기엔 이런 말이 나온다.


‘아무도 기부로 가난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때? 손해 볼 거 없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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