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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Dec 08. 2022

영화 ‘주토피아’로 보는 나의 정체성과 편견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1. 서론

  <정체성: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사전전에서 정의하는 정체성의 뜻이다. 이렇듯 국립국어원은 정체성의 뜻을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지만, 나는 내 존재의 가치와 본질은 내가 정의하는 대로 정해지며, 그 '나의 정의'라는 것도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태어나서 처음 생각한 대로 쭉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 생각은 나뿐만 아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내가 이번 글을 통해 분석해 볼 영화 <주토피아>도 이러한 주변 사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 정체성의 변화를 다룬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과연 나는 나의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일까?


2. 본론

-기존의 편견

(주디의 고향, 주디가 경찰이 되기까지)

:주디

 주디의 고향은 우리 인간사회와 같이 사회가 구성되어 있고 평범한(?) 편견들과 사건들이 있다. 토끼에게 토끼다움을 강요하고, 여우는 여우답게 약자를 괴롭힌다. 그런 생각을 주디에게 심어주는 것은 그 사회 구성원 모두이다. 주디는 이 곳에서 부모님의 말과, 직접 겪은 일로 여우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된다. 복선으로 쓰이는 여우 퇴치 스프레이는 마음 한 구석에 남은 편견을 상징한다.

 반면 주토피아는 "모두가 똑같을 수 있고 모두가 평등한 이상사회"를 지향한다. 주토피아의 모토인 "Where Anyone Can Be Anything"은 주디에게 "토끼에게 토끼다움을 강요하지 않는 곳"이다. 다른 어떤 동물에게도 고정된 정체성이 없음을 지향하는 세계이다. 편견의 세계에서 편견이 없는 세계로의 이동인 셈이다.

  주디는 편견을 깨기 위해 홀로 노력해서, 결국 편견을 극복하고 최초의 토끼 경찰관이 된다. 하지만 경찰이 된 주디는 또 다시 연약한 토끼라는 편견에 가로막혀 사건이 아닌 주차딱지나 떼는 신세가 된다. 주디는 이렇게 편견의 피해자로 시작한다.

:닉 와일드

  닉은 어린 시절 초식동물들에게 포식자 포지션의 동물과 여우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당한 괴롭힘으로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역차별에 관한 내용은 다음문단에서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이 사건 역시 약자들이 집단으로 뭉쳐 편견을 이용해 행한 역차별 사례이다. 그 사건으로 닉은 세상의 편견에 체념하고 그 편견에 부응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편견이 그 편견에 부합하는 존재를 만들어 냈고, 그 존재는 다시 편견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편견

(극 후반부, 편견의 피해자였던 주디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 역차별)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강한 자는 악하고, 약한 자는 선하다는 편견이 있다.

  <주토피아>도 중반부까지의 인물 설정(정체성)은 바로 이 편견에 맞게 흘러간다. "주토피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라는 시장의 말은 진실인지 아닌지 중요치 않았다. 물론 정황상 범죄의 배후로 보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주디는 변명도 시장의 자기변호의 기회도 무시한 채 냅다 구속해 버린다.

  라이언 하트 시장은 사자로서 강자고, 그러니 악할 것이라는 편견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장 밑에서 일하던 양 벨 웨더는 새로운 시장이 된다. 약자이니 선할 것이고, 모든 것은 제자리로 가는 듯 했다.

  중후반부 기자회견 시퀀스부터 극의 양상이 바뀐다. 기자회견을 기점으로 줄거리나 전후의 분위기를 뒤집는 전환점이 된다. 기자회견장에서 주디는 지금까지 본성이 발현된 모든 동물이 맹수였고, 또한 생물학적인 요소와 관련 있으며 포식자들이 다시 원시적인 야수로 되돌아가는 듯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개개인의 성향과 환경과는 전혀 무관하게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근원적인 정체성을 문제 삼은 발언이다. 이는 알게 모르게 주디에게 내재되어 있던 맹수에 대한 편견이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초반에 나왔던 ‘여우 꺼져 스프레이’가 이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편견의 피해자였던 주디 또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언론에 의해 파급력을 가지고 전파된다.  ‘맹수는 위험하다’는 편견은, 주토피아의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식동물들의 전체로 퍼진다. 결국 약자의 포지션이었던 초식동물이 반대로 강자의 포지션에 있는 육식동물에게 “숲으로 돌아가 이 포식자야!”라고 외치기에 이른다.

  그 후 경찰서에서 벤자민은 포식자 동물이라는 이유로 민원상담창구에서 자리를 옮겨야 했고, 대중교통같은 공공장소에서도 초식동물들이 포식자계 동물을 일부러 피하는 모습이다. 강자와 약자가 뒤바뀌고 사회의 역차별이 시작된 것이다.


:닉과주디

  파트너가 여우를 포함한 맹수에 대한 편견을 보이자 닉은 어린 시절의 극복되지 못한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모습을 보인다. 일부러 주디를 위협하고는, “내가 무서워? 널 잡아먹을까봐?” 하며 체념하는 닉의 모습을 보자. 이 대사는 앞서 봤던 편견의 강화, 재생산의 또 다른 양상이다. 진심으로 자기를 대해주는 주디는 편견이 없을지 모른다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편견이 있었고, 아무도 여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편견은 더욱 확고해졌다. 믿었던 파트너로부터 그것을 확인받았으니.

  기자회견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주디. ‘편견이 있는 보수적인 시골’인 줄만 알았던 주디의 고향은 반대로 주디의 편견이 다시 깨어지는 공간이 된다. 어린 날 주디를 괴롭혔던 여우, 기디온은 건실한 청년이 되어 주디의 부모님을 돕고 있었고, 이성을 잃고 사나워지는 현상은 맹수에게 한정된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렇게 주디의 편견을 깨고 생각을 바꾸게 해준 인물이 항상 편견(토끼다움)을 말하던 주디의 부모님이었고, 그런 부모님의 편견을 깬 것이 주디 본인이었다는 점이 인물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변할 것 같지 않던 마을과 구성원들의 정체성이 자연스레 바뀌어진 모습이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줬다는 건 누군가의 모습과 태도는, 즉 사람의 정체성은 양면성이 있거나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편견을 타파하고 변화했는가?

:주디와 닉

주디는 다시 주토피아로 돌아가 닉에게 자신이 틀렸고 자신이 오히려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며 사과한다. 주토피아의 편견을 없애고 원래대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며 닉에게 다시 함께하자고. 닉은 처음에 주디와 만났을 때와 같이 당근펜으로 그 사과를 장난스레 녹음한 뒤 주디의 사과를 받아드린다. 이들의 화해는 서로의 안에 남아있던 편견의 극복을 의미한다.

:주토피아

  닉과 주디의 재결성으로 마침내 흑막이었던 '초식동물' 벨 웨더를 체포하게 되자 각자의 편견으로 피해봤었던 이들이 점차 돌아왔다. 자리를 옮겼던 벤자민도 직원들의 도넛 선물과 사과를 받고 다시 탁 트인 로비 자리로 돌아왔고, 다른 동물들도 다시금 사이 좋은 모습으로 지내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인 닉과 주디는 능청스럽게 농담을 주고 받는다.

  "왜 이래, 날 사랑하면서?"

  라는 대사로 둘의 사이가 동료 이상인 사실을 암시하는 것은 물론, 이제야 비로소 편견없는 주토피아가 되었음을 못박는 대사가 있다.

  "교활한 토끼."

  "멍청한 여우."

  아, 느림보라고 편견아닌편견(?)이 있는 나무늘보가 과속운전으로 주디에게 걸린 장면은 덤이다.


3. 결론

  영화 주토피아에서처럼, 오랫동안 고착화된 편견 또는 그것을 억지로 뒤집으려는 역차별 인식이 우리의 정체성을 방해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정체성은 사회의 분위기나 편견으로서 만들어져 있는지도. 작 내 주토피아 세계처럼, 진정으로 제약 없는 상태에서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지향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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