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생 영희의 고향이야기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내가 살던 동네가 반갑고 매일 만나는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또다시 일상이 시작되고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돈을 저축한다. 힘든 일상을 보상받기 위해 여행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또 여행을 떠나기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행은 나의 삶 속에서 '소소한 꿈의 실현'이라는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영희의 여행에 대한 단상-
어머니의 앨범 속 여행사진에서 우리 마을의 영웅들을 만날 수 있다. 한 마을의 황금기를 '인구가 가장 많았던 시기'로 정의한다면 우리 마을의 최고 번성기인 바로 그때를 이끈 장본인들이다. 40년도 더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만큼 지금 고향에 가도 들판 어디쯤에서 만날 것만 같다. '영희 오나~ 엄마는 저 아래 논에 가드라 ' 그런 한두 마디가 인사의 전부지만 늘 한결같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좋은 것은 자식과 부모를 먼저 챙겨야 했고 항상 땀범벅에 흙투성이 모습으로 어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그 짐을 모두 벗어놓고 떠나는 자유의 시간이 있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마을 사람들과 단체여행 가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미장원, 이발관도 다녀오고 옷장에 모셔둔 제일 멋진 옷을 꺼내 입고 유명한 관광지로 가서 구경하고 흥에 겨우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하루를 즐겼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거나 오성급 호텔에서 잠자는 것도 아닌 소박한 여가생활이지만 그분들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장식하며 여행다운 여행을 즐기셨다. 지금은 구순이 되신 경화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요새는 아무 재미가 없다. 느그 엄마하고 전국으로 유람 다닐 때 그때가 재미나드라" 그 말 한마디로 이 글이 시작되었다.
전국적인 관광산업은 70년대부터 활황기를 맞았고 인근의 부곡 화와이는 79년에 개장하여 관광차가 넘쳐날 때지만 우리 마을의 사정은 그에 미치기는 역부족이었는듯하다. 드디어 1980년 4월! 우리 마을에도 단체관광의 첫 포문이 열렸다.
옛날 필름카메라의 날짜 기능의 도움으로 사진 찍은 날을 따라 옛날 80년대 10년 동안의 전국 관광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1980년 봄
첫 관광지는 경주 불국사!
우리는 이 사진을 보며 10원짜리 동전에서만 보던 다보탑이 실제로는 엄마키보다 몇 배나 더 크고 웅장하여 놀랐던 기억이 있다.
도시에 사는 웬만한 사람들은 양장이 한벌쯤은 있을 때이지만 우리 마을 엄마들은 여전히 집안 결혼식이 있을 때나 입던 한복을 입고 버선에 흰 고무신을 신고 있다. 그날 현지에서도 꽤나 이색적으로 보인 드레스 콘셉트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너도나도 같이 맞춰 입었으니 옷 때문에 여행의 즐거움이 반감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고 싶다.
하얀 목련은 만개하고 벚꽃은 꽃몽오리를 머금고 있는 4월 초순임을 알 수 있다. 아직 젖을 못 뗀 아이는 두고 갈 수 없어서 동행했나 보다.
사진의 우리 아버지들은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정장차림을 하고 있다. 가히 멜로영화의 주연급 배우 뺨치는 모습이다. 그분들에게도 화려했던 청춘과 로맨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원대한 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그것을 버리고 희생하는 삶을 사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시대를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구도는 많이 아쉽지만 대상 인물들이 모두 프레임 안에 다 들어온 것만으로도 성공한 작품이다. 지금처럼 개인 카메라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 읍내 사진관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카메라를 대여하여 여행을 간다. 사진관에서 배운 작동법을 숙지하고 가지만 자주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인물을 중심에 두고 흔들리지 않게 셔터를 누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메라 파인더에 눈을 가까이 대고 대상이 프레임 안에 잘 들어오도록 맞춘 상태에서 카메라를 잡은 왼팔은 움직이지 않는 채로 숨을 참고 오른손 검지로 적당한 힘으로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렇게 한컷한컷 부지런히 찍어왔지만 초점을 잘못 맞추거나 빛에 너무 노출되거나 흔들려 대상을 알아볼 수 없어서 버려지는 컷이 많았다. 사진관에서 자체 선별한 사진들을 모두 한 장씩 뽑아와 집집마다 돌아가며 그것을 보고 각 사진별로 찾을 장수를 사진 뒤에 표시해 주면 사진관에서 그 수에 맞게 인화해서 나눠가졌다. 누군가는 사진 찍고 찾는 일을 위해 그 수고로움과 시간을 바쳐 지금 이 사진이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도 사진을 보고 우리는 여행을 간접적으로 즐길 수 있었고 또한 아버지 엄마들의 얘깃거리가 되었다.
동네 아이들은 저 멀리 십자둘에서나 영산 죽전 앞으로 버스 한 대 보이면 모든 눈은 버스와 같이 움직이며 '제발 우리 동네로 들어와라 들어와라' 하다가 그냥 지나치면 '에잇' 실망하고 또 다음 버스를 그렇게 밤늦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우리 동네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환호성을 지르며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고 뛰어서 버스마중을 나간다. 엄마가 버스에서 내리면 막내는 치맛자락을 잡고 울며 불며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눈물을 뚝 그치게 하는 것이 관광지에서 사 온 기념품이다. 달콤한 엿도 입에 하나 넣어주고 사진엽서, 관광지도와 족자 효자손이나 안마봉 등도 손에 쥐어 주셨다. 기념품 중에서도 장난감 카메라는 정말 신기했다. 딸깍딸깍 누르면서 카메라 안을 들여다보면 관광지의 풍경사진이 옆으로 한 장씩 지나가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1980년 여름
그해 여름에는 첫 여행보다 더 많은 엄마들이 참석했고 사진으로 확인되는 장소는 국립묘지(현. 현충원)이다. 전란을 겪은 세대여서 그곳에 연고자가 있건없건 수많은 희생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마음의 빚을 안고 추모와 관람을 하였을 것이다. 여행 당일에 비가 왔는지 땅도 젖어있고 바닥에 우산이 놓여있어 날씨가 아쉬웠던 여행이었을 것 같다.
엄마들은 여름 쉬폰 소재의 까슬까슬한 원피스 또는 투피스를 이 날을 위해 한벌씩 장만하신 것 같다. 여름옷과 신발은 돈을 얼마 들이지 않아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영산장날이나 남지장이 서는 날 함께 가서 골랐는지 다른 듯 같은 느낌의 패션이다. 또한 파마한 지 며칠 안된 머리가 깔끔하고 단정하다. 우리 동네 단골 미장원이던 영산 동백미장원 원장님의 재빠른 손놀림이 엄마들 헤어스타일에서 느껴진다.
1981년 봄
여행 2년 차인 1981년 봄 관광지는 어느 섬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깃발이 집에 오랫동안 걸려있었는데 이때 사 온 여행기념품일 것이다. 대부분 창녕에서 나고 자라신 분들이라 거의 바다를 처음 보셨거나 배를 처음 타본 분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사진은 요즘 SNS에 오르는 아찔한 인생샷을 방불케 한다. 바다 위 작은 갯바위 위에 한복과 정장을 입은 어머니 아버지는 위태롭지만 멋진 샷을 연출하고 있다. 코고무신을 신어도 못 갈 곳이 없는 씩씩한 우리 엄마들의 모습이다.
유람선 안에서 음식을 드신다. 종이컵으로 건배하시는 분, 사이다병이 놓여있고 영희 엄마는 상추쌈을 들고 있다. 아마도 바다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생선회를 드시고 있을 것이다.
1982년 봄
여행 3년 차 1982년 봄여행은 경상남도 진주 남강의 진주성과 촉석루였다.
촉석루 아래에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몸을 던져 순절한 의암이다. 바위로 오르는 통로가 험난하고 웬만한 폐기로는 바위 위에 서있기 어려운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은 빼곡하게 서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저분들은 이미 극한의 고생을 겪고 자식 여럿을 낳고 키우면서 이미 천하무적 슈퍼맨 슈퍼우먼이 되어있었다. 특히 맨 앞줄의 한복을 입은 영희의 엄마는 우주최강 여전사였다.
사진 속 아버지들의 얼굴에 지금 그 아들들의 얼굴이 그대로 들어있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판박이, 붕어빵, 복사판이다. 역시 유전자의 힘은 강하다.
요즘 저출산을 넘어 애를 안 낳는 딩크족 가정이 늘어나는 세상에서 이분들의 업적은 가히 국가와 인류번영에 이바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 등의 정부가 주도한 산아제한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칠 때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집마다 자식을 평균 5명은 키워 낸 공로자들이다.
1983년 봄
1983년 4월에 드디어 우리 할머니들이 1박 2일로 생애 첫 효도 여행을 떠나시게 되었다. 평소 집 밖에도 안 나가시던 영희의 큰할머니뿐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좋은 시절도 없이 나이 드신 할머니들에게는 이 나들이는 참으로 큰 기대와 두려움이 섞였을 것이다.
남해대교는 73년도에 개통한 남해의 노량리에서 하동의 노량리를 잇는 현수교이다. '남해대교를 걸어서 건너면 무병장수한다'는 설에 따라 다리를 걷는 것이 남해대교 관광의 백미였다. 사진에는 영희의 엄마가 앞장서고 그 뒤로 큰할머니와 부천할머니를 비롯해 여러 명이 남해대교 위를 걷고 있다. 우리 할머니들은 무병장수해서 아들 며느리 고생 안 시키고자 하는 바람으로 한 발 한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셨을까?
여행 이후 빨간색 남해대교가 자수로 박힌 작은 족자가 우리 집 방에 걸려있었다. 우리 남매들은 그것을 보고 이순신장군과 노량대첩을 역사책 보다 먼저 접하게 되었다.
남해대교와 남해충렬사 관광은 패키지여행코스일 텐데 사진의 배경은 충렬사는 아니다. 불심이 높은 할머니들을 위해 여러 사찰 순례하기를 일정에 포함시켰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느 절을 가셨는지 사진으로는 알 길이 없고 1박 2일 코스로 짜였음을 옷이 살짝 바뀐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들을 모시고 간 엄마들의 사진이다. 그 선두에 항상 영희 엄마가 있었다. 창녕군 영산의 부녀회 회장 강여사하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신여성이지만 여행 4년 차인데도 똑같은 한복을 입고 봄 여행을 갔다. 옷 한 벌을 장만하려면 당장 자식 다섯이 눈에 밟혀 선뜻 맘을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랬던 엄마를 생각하는 자식의 맘이 짠하게 가슴이 아려온다.
사진은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호 관광지에 있는 영산강유역 농업개발기념탑이다. 장성까지 가셨으니 인근에 가장 유명한 백양사를 순례하셨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여행 둘째 날에는 계단이 많은 어느 동굴로 가셨다. 음료수 광고모델 마냥 엄마들은 유리병을 들고 찍은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캔 음료가 보편화되기 전이라서 무거운 병음료를 박스로 사서 관광차에 싣고 여행을 가셨다.
1983년 여름
1983년은 6월엔 드디어 제대로 된 서울구경을 가게 된다. 뭐니 뭐니 해도 서울구경의 제1순위는 왕이 살던 경복궁이고 그다음은 놀이공원일 것이다. 그 두 곳은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하고 속세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광경에 '우와~'하는 감탄사를 절로 자아내게 하는 곳이다.
서울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앞에서 어머니 아버지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마을사람들 중에서 여행을 잘 가시지 않는 분들이 계셨다. 여행을 '놀러 간다'라고 했고 어른들의 '노는 것'에는 '노래와 춤'을 동반하므로 그렇게 '어울려 노는 것'에 것이 부담스러운 분들인 것이다. 이 여행에는 여행사진에서 잘 뵐 수 없는 면장님과 사천할아버지 내외분도 계신다.
지금도 인기만점인 용인 자연농원(에버랜드)에서 하늘관람차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영희엄마는 바지 정장을 입고, 다른 엄마들도 스커트정장에 밝은 색 재킷으로 멋을 낸 모습이다.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행사장소로 알려진 충청남도 당진의 삽교천유역농업개발기념탑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기념식에 참석(76년 10월 26일)하고 당일 저녁 암살당한 것이다. 당시 아버지 어머니에게 박대통령은 굶주리고 못살던 농촌을 잘살게 해 준 은인으로 기억되던 시대이다.
사진 속의 노란 모자는 당시 여행에서 사 온 기념품인데 오래도록 우리 집 나무기둥 어디엔가 걸려있어서 일하러 나갈 때 쓰고 나갔다.
1986년 봄
사진은 3년 뒤로 건너뛴다. 84년과 85년의 여행사진이 없는 이유를 알 수는 없다.
86년 봄여행 사진은 장소를 추정할 수 없는 단체사진이 딱 한 장만 남아있다. 선글라스를 낀 아버지는 당시 부산으로 이사 가서 횟집으로 성공해서 아주 잘 산다고 했다. 그렇게 마을을 떠나 도시로 이사 가는 가구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1986년 여름
86년 8월과 90년 5월은 같은 곳으로 보이는 계곡으로 휴가를 가셨다. 흐르는 물속에 음료수와 막걸리를 담가놓고 빨간색 천막을 치고 야외무대를 멋지게 꾸몄다. 흰 나시 아버지들은 86년 7월 영국 윔블던 스타디움에서 열린 전설적인 공연의 프레디머큐리 스타일이다. 누가 봐도 머큐리를 능가하는 비주얼을 자랑한다. 노래 솜씨 또한 빼어나셨던 분들이다.
86년은 장구리듬에 맞춰 맨발로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치열하게 일하고 놀 때는 제대로 놀 줄 하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야 말로 강남스타일 싸이도 울고 갈 까지꼬 스타일의 멋쟁이다.
영희의 고모할머니의 자제분인 박 씨 두 남매는 우리 마을 장구의 신이다. 장구를 치던 리듬감도 유전이 되는지 그 자제들도 모두 음악 감성이 남달라 어디를 가든 두각을 드러낸다.
90년에는 장구대신 큰 카세트를 틀어놓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어떤 곡이 저렇게 춤추게 만들었을까 궁금하여 검색해 보니 90년의 히트곡은 태진아의 거울도 안 보는 여자, 현철의 싫다 싫어, 주현미의 잠깐만, 김완선의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이 검색된다. 읍내 레코드방이나 버스터미널 앞에서 판매하는 히트곡 모음 테이프는 정기적으로 사는 필수템이었다.
1987년 여름
1987년 여름 관광은 다른 해 여행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할머니들과 어머니들 그리고 그다음 젊은 세대까지 3세대가 함께 간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충청남도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개관했기 때문이다. 87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개관을 했는데 개관 직후 그달에 곧장 관광을 간 것이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 여행지였을 것이고 그것을 붐비는 인파가 증명해 주는 듯하다.
우리 마을 점빵 사모님인 어릿골 할머니, 부천할머니도 가셨지만 영희의 큰할머니 작은 할머니는 먼 거리가 자신이 없으셨던지 안보이시고 대신 덕산 작은 할머니를 어머니가 모시고 가셨나 보다.
1989년 봄
이 글의 대미를 장식할 여행은 바로 89년도에 떠난 해외(바다 건너) 여행, 제주도 여행이다.
여행사 패키지는 인원수에 따라 금액이 반비례하므로 되도록이면 많이 참석하는 것이 경비가 저렴해지는 이유로 고개 넘어 덕산 사람들도 함께 갔다. 같은 일행을 표시하는 이름표를 왼쪽 가슴에 부착하고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생애 첫 비행기를 탄 날 제주국제공항 앞에 선 영희 엄마의 멋진 모습이다. 그 이후 제주는 여러 번 가셨지만 우리 네 딸과 며느리와 함께 간 '엄마의 생애 마지막 여행' 또한 제주도였다. 몸이 많이 아픈 상태였는데도 끝까지 힘든 내색 없이 아름다운 추억여행을 만들어 주셨다.
돌아오는 여정은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뱃길이었다. 배의 규모가 크지는 않은지 실내가 비좁고 사람이 꽉 찬 모습이다.
서귀포 천제연폭포 위의 칠선녀다리(선임교)를 배경으로 천제루의 난간에 앉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금도 제주의 봄은 유채꽃밭이 인기 포토존이다. 47세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노란 유채 위로 흰 블라우스와 짙은 곤색 재킷을 입은 우리 예쁜 엄마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마지막 사진은 지금은 없는 우리 마을의 옛 건물과 풍경이 보인다.
91년 봄 여행 가는 날 새벽에 엄마는 리어카에 준비한 음식을 실어 마을 앞에 내려놓고 관광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여행이 끝나고 다시 또 제자리로 돌아와 일상을 치열하게 살다가 다시 또 새로운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는 먼 여행을 떠나셨다.
영희는 생각한다.
그분들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그 의미 중 하나는 '전쟁을 나가는 전사들이 전투력 향상을 위해 만찬을 즐기고 궐기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여행 후 시작되는 농번기의 극한의 고통을 감래하고 또 보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평생을 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벗어놓고 온전히 자기 자신의 옷을 입는 시간'이다. 그렇게 자신을 되찾는 힘은 자식도 돈도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어려운 시대를 같이 고생하며 살면서 쌓이고 두터워진 정을 나눈 동지들과 함께 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며 하늘나라를 함께 유람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