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인 오빠에게 청인처럼 말하기를 훈련시키고 언젠가는 기적이 일어나 귀가 들릴 거라고 믿었던 엄마의 행동이 오디즘에 입각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안 지 오래되지 않았다. 오디즘(audism)은 ‘청능주의’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듣는 게 우월하다’는 신념이다. 당연한 말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으나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게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라 ‘듣는 사람과 다른 생활양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월과 열등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조가 듣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구성되어 있어 이에 맞지 않는 사람은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만일 사회가 청각장애인에게 유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농인은 청인 중심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노력해야 한다. 듣고 따라 하는 발성을 청인처럼 하지 못해 혀를 맞아가며 훈련한 농인이 있듯이 똑같이는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라도 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나는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까 봐 못 알아들은 말도 알아들은 척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때가 셀 수 없이 많다. 내가 진짜 알아들었는지 되물은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랬더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드러날 거짓 행동이었다.
아이들이 독립한 후 재취업을 준비할 때의 일이다. 필기시험을 본 후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치과에 갈 일이 생겼다. 스케일링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의사가 내 혀 밑을 들여다보더니 설소대를 조금 자르면 말하기가 훨씬 편해질 거라며 설소대 수술을 권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로부터 혀 짧은 소리를 낸다며 놀림을 받은 기억이 있어서 두려운 마음을 누르고 수술을 하겠다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가 잘 몰라서 수술을 한다고 했는데 사실 설소대를 자르는 건 조선시대에 혀를 자르는 형벌과 크게 다른 게 아니었다. 혀를 자르나, 혀 밑을 자르나 그게 그거였다. 설소대는 혀와 구강저, 즉 입의 바닥을 연결하는 끈 같은 건데 이걸 살짝 자르고 바늘로 꿰매면 혀를 좀 더 멀리까지 내밀 수 있는 효과가 있다.
설소대 수술할 때 생각하지 못했다가 지금 떠오른 사실은 내 발음이 남달랐던 게 어쩌면 설소대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다. 청력이 약하니 특정한 단어를 다른 사람이 발음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내 식으로 말했고 그게 혀가 짧아서인 것처럼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청력이 점점 약해져 가면서 말하는 능력이 떨어질까 봐 요즘은 기회가 되는대로 말을 많이 하려고 애쓴다.
설소대를 잘라내어 혀를 전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수술을 결정하기 전에 ‘오디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면 수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 나는 청인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농인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는 신념이 생겼기 때문이다. 농인도 아니고 청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사는 것보다 어느 한 편에 서기로 결심하면 삶이 훨씬 편해진다.
흑인의 유전자를 갖고 있으면서 백인으로 사는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내용인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이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온 이유는 나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평생 살면서 이 명제 하나를 깨우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