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과학자, 그리고 사랑> 3부
중국 새로운 명문대 의대로 이직과 동시에, 나는 교수 아파트에 정착했다.
아침에는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했고, 저녁 8시가 훌쩍 지나서야 귀가했다.
하루 끝의 숨을 고르며 걸어가던 어느 날,
두 마리의 고양이를 품에 안고 산책하던 40대 후반의 여성을 마주쳤다.
“여기 학생인가요? 늘 늦게 들어오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한국에서 해외 고급인재로 임용된 부교수예요.”
“벌써 부교수요? 와…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문장 뒤로 작은 한숨이 섞였다.
“저는… 남편 따라 미국에서 돌아온 지 1년 됐어요.”
알고 보니 그녀 역시 과학자였다.
남편은 미국에서의 성과가 인정되어 중국 명문대 교수로 임용되었지만,
그녀는 포닥 이후 시니어 사이언티스트로 오래 일했어도
정작 중국의 교수 임용 기준에는 닿지 못했다고 했다.
남편만 커리어를 이어가고,
그녀는 아이 학교 보내고, 고양이를 돌보고, 시간의 여백을 메우며 지냈다.
“부럽네요. 교수로 일하는 여성… 정말 보기 힘들어요.”
그녀의 눈빛에는 부러움보다 더 깊은 결이 있었다.
‘한때는 나도 그 길을 꿈꿨다’는, 그리고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 선택에 대한 조용한 체념.
얼마 전, 공교롭게도 나는 학회장에서 그녀의 남편을 보았다.
내가 좌장을 맡았던 세션 옆 세션의 좌장, 신경과학 교수였다.
학문적 위상, 스포트라이트, 안정된 지위는 모두 남편의 몫이었다.
밤길을 걸으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내가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병행하며
포닥과 연구를 이어가야 했다면—마흔 즈음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가 미국 버클리에서 보낸 1년은 햇살처럼 눈부셨지만 동시에 칼바람처럼 차가웠다.
과학자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탁월한 경험이었지만, 생활은 늘 빠듯했고,
연구자는 늘 시간과 비용 사이의 간극을 메꾸며 살아야 했다.
그곳에서 몇 년을 버텨 기껏 논문 한두 편을 겨우 마련하는 구조.
생활비 지출과 스튜디오(미국의 원룸) 월세를 내고 나면 통장에 남는 것은 많지 않았고,
낯선 땅에서 커리어를 지키는 삶.
나는 또 한 번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조용히 확인했다.
나는 젊은 시절, 내 논문의 황금기가 만들어질 때
그 성과를 가장 단단하게 펼칠 수 있는 곳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 위에서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밤공기 속에서, 나의 호흡이 조금 더 깊어졌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질문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여성 과학자에게 ‘가정’과 ‘커리어’는 정말로 함께 갈 수 있는 길일까.
아니면 끝내 조심스레 걸어야 하는 아름답지만 불완전한 모순일까.
같은 기초의학교실에서 일하는 A 교수님은, 50대에도 늘씬하고 우아한, ‘자기 관리를 안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한 할아버지가 사진첩을 들고 사무실에 찾아왔다. 그때 A 교수님은 강의 중이었다.
“교수님께 전해 주세요.”
그는 사진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떠났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A 교수님은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보며 말했다.
“아이의 할아버지예요. 아이 성장 사진을 보내주셨네요.”
그 말 한마디에 상황이 전부 이해됐다.
A 교수님의 남편은 외과 교수였다. 의대 동기, 10년 연애, 결혼, 교수 임용, 출산—
누가 봐도 ‘완벽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의대 부부였다.
그러나 그 완벽함은 40대 초반, 남편의 외도로 무너졌다.
상대는 병원의 간호사였고, 더 충격적인 건 아이까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혼.
양육권은 A 교수님이 가져갔고,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날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딸아이가 올해 대학 졸업하고 취업했는데, 비혼으로 살겠대요.
엄마로서 절대, 딸아이가 결혼하라 애 낳으라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유머도, 투정도 아닌— 시대가 남긴 상처의 완곡한 문장이었다.
같은 기초의학교실 다른 과에서 근무하던 B 교수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10년 전 해외 고급인재로 초빙되어 중국 의대로 온 그는
연구력도 탁월했고, 제자들도 신뢰하는 든든한 중년의 교수였다.
기러기 생활이라 아내와 자녀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고,
그는 혼자 중국에서 학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그는 갑자기 사직서를 내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퇴장이었다.
뒤이어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B 교수는 같은 교실의 여교수와 외도했고, 그 사실이 아내에게 들켜 이혼 소송까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 여교수는 유부녀였고, 그 관계 덕에 교수 자리를 얻었다는 말까지 돌았다.
실력으로 견디는 여성 과학자들에게 그런 ‘기회주의자’의 행보는 더욱 모욕적이었다.
한 사람의 일탈이 종종 여성 전체의 이미지를 먹칠하기 때문이다.
가정과 커리어는 과연 공존 가능한가? 혹은, 그 조합 자체가 애초에 모순일 뿐일까?
의대라는 압축된 세계에서, 내가 들여다본 결혼의 민낯은 늘 비슷한 결말을 향해 수렴했다.
애써 쌓아 올린 커리어를 지키는 순간, 가정은 금이 가고
가정을 선택하는 순간, 커리어는 멀어지는 구조.
이 질문은 누군가의 사생활을 넘어서,
‘여성 과학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더 근본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교수아파트에서 지내다 보면, 은근히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언밸런스 매치라 불리는 결혼의 형태다.
학력·직위·수입·사회적 지위—모든 조건이 비슷한 커플보다는
오히려 한쪽이 현저히 더 바쁘고, 더 높은 고을 오르는 구조가 더 자주 보였다.
내가 아는 30대 여성 강사 C도 그중 한 명이었다.
대학 강의, 연구, 학생 지도까지 겹쳐 늘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중소기업 회사원. 퇴근 시간이 규칙적이고 여유가 있어 아이 등하원부터 집안일 상당 부분까지 도맡는 사람이라고 했다.
C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보다 잘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 이제는 전혀 없어요. 저의 커리어를 이해해 주고,
저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지지해 주는 사람이라면 그걸로 충분하거든요.”
그 말은 화려한 이상이 아닌, 현실을 통과해 온 여성이 얻은 조용한 결론 같았다.
그리고 그 진실함 속에는 여성 교직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겸허함과 지혜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결혼은 겉보기에 안정적이었고, 그들의 가정은 참 따뜻해 보였다.
어느 날 문득, 그녀가 매일 오후 4시쯤이면 자리에서 사라지는 걸 눈치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선생님, 매일 같은 시간에 잠깐 나가시던데… 무슨 일 있으세요?”
C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답했다.
“딸아이 유치원이 좀 일찍 끝나서요. 집에 데려다 놓고 오느라 그래요. ㅎㅎ”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아무리 ‘언밸런스 매치’라고 해도, 엄마라는 자리에서 요구되는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는 걸.
남편이 집안일과 양육을 많이 분담해 준다 해도, 아이의 밥을 챙기고, 감정을 살피고, 성장의 틈을 메워주는 역할은 여전히 그녀가 맡고 있었다.
커리어의 속도는 달라도 부부의 역할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언밸런스’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균형을 요구한다.
그녀의 삶은 안정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수정과 조율의 시간,
그리고 엄마로서 지울 수 없는 책임의 무게가 있었다.
커리어는 안정적으로 다져졌지만, 결혼 적령기를 훌쩍 지나버린 딸을 보며
엄마는 여전히 ‘사랑’과 ‘가정’을 걱정한다.
“이제는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오붓하게 사는 모습 좀 보고 싶다.”
그건 시대를 건너온 한 세대의 애틋한 소망이자, 딸의 행복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염려다.
그리고 딸이 덜 외롭고 덜 힘들기를 바라는 깊은 마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 나는 지금 삶이 좋아. 누구의 기대에 맞추기보다, 나답게 일하고 살아가는 게 더 좋아.
결혼도, 육아도… 지금의 나는 굳이 선택하고 싶지 않아.”
엄마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묻는다.
“남의 집 아기 봐도 하나도 안 부러워?”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응, 안 부러워. 아이를 낳는 건 이제 사랑의 연장선이 아니라 한 인간의 미래를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잖아.
나는 내 시간을 나답게 쓰는 삶이 좋아. 그게 지금의 나와 더 잘 맞아.”
그 대화를 지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보다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관계’를 갈망해 온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머니가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많은 생명을 세상에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연구실의 제자들, 내 손을 거쳐 완성된 논문들, 수없이 쌓아 올린 생각과 연구들.
그 아이들은 내 지식의 씨앗으로 자라나 각자의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을 떠나보낼 때 느껴지는 묘한 뿌듯함—그건 생물학적 육아와 또 다른 방식의 정신적 탄생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내 삶의 방향을 흔들지 않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세 가지 삶의 형태를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다.
가정을 위해 커리어를 내려놓은 여성,
커리어는 성공했지만 가정을 잃은 여성,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버텨내는 여성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채 자신만의 궤도를 만들어 가는 나.
나는 타국의 대학 연구실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밤이 깊어지면 조용히 불을 끄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삶 속에서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고, 고요하지만 공허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더 단단해진다.
결혼과 가족은 내 인생의 결핍이 아니었다.
다만 다른 형태로 변주된 사랑이었다.
연구실의 학생들이 내게 찾아와 자신의 논문을 보여줄 때,
그들의 성장이 나의 시간과 닮아 있을 때, 나는 분명히 느낀다.
이것이 나의 또 다른 ‘가족’이고, 이 또한 삶을 잇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나의 세계를 돌보고, 나의 아이들을—연구와 제자와 글이라는 이름의 생명들을—
지금 이 순간도 세상으로 보내고 있다.
결국 삶이란, 형태를 바꿔가며 이어지는 사랑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피와 살의 가족이든, 생각과 지식의 가족이든,
그 둘 다 결국은 누군가를 세상에 보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는다.
여성 과학자에게 ‘가정’과 ‘커리어’는 정말 함께 가질 수 있는 꿈일까?
아니면 우리는 이제 ‘다른 형태의 공존’을 찾아야 하는 세대일까.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하나는 확실히 안다.
지금의 나는 나를 잃지 않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 위에서, 오늘도 조용히, 묵묵히, 나의 과학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가 내 내일을 움직이는 가장 단단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