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과학자 그리고 사랑> 2부
중국 첫 대학에서 일하던 어느 날, 인사과 언니가 문을 살짝 닫더니 유난히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박 교수님, 이렇게 예쁘신데… 왜 아직 혼자예요?”
그러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우리 학교 중국 총각이랑 연애—결혼은 어때요? 제가 소개도 해드릴 수 있어요.”
나는 웃어넘기듯 말했다.
“사실… 저한테 자상하게 잘 챙겨주는 남자 교수님이 한 분 있긴 한데, 조금… '이상해요'.”
언니는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래요? 어떤 사람인데요? 신상, 가정상황, … 필요하면 제가 알아봐 드릴까요? 필요하면 저 활용해요~”
그 순간이었다.
내 삶에 조용히 균열을 남길 ‘자상한 중국 남자’가 등장한 건.
중국 대학 동료였던 정형외과 교수.
나는 속으로 그를 ‘뼈박사’라고 불렀다.
대학원 시절, 스승님이 상하이 국제학회에 다녀오신 후 이런 말을 들려주셨다.
“주최 측 교수 세 분이 다 중국과학원 원사급 여자 교수님들이었어.
60대인데도 학회장을 활개 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더군.”
스승님이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물었다.
“근데, 이렇게 바쁘면 집에서 밥은 누가 해요?”
그러자 여장군 같은 교수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밥은 남편이 다 하죠. 하하하!”
스승님은 그 이야기를 하며 말했다.
“중국 남자들, 의외로 되게 자상해.”
그 말 덕분일까.
나는 막연히 ‘중국 남자는 자상하다’는 이미지가 생겼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 마음 한가운데 견고한 철문을 하나 세워두었다.
연애는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정서의 리듬’을 조율해야 가능한 일이다.
결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인생을 실제로 나누는 일이다.
그 모든 기반이 다른 상대에게 내 마음은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다정함이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언어가 맞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에 단단한 원칙을 세웠다.
“여기서는 오직 커리어만 본다.”
중국으로 전임교수 임용을 받고 온 순간, 나는 이미 결심했다.
나는 과학자로서의 삶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어느 정도 결혼과 가정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누가 다정하게 다가와도 내 안엔 항상 조용한 목소리가 있었다.
“일로 만난 사이.”
뼈박사와 처음 만난 건 학회 만찬 자리였다.
동료 교수와 식사 중이었는데, 의대 동기라며 그가 합석했다.
“박 교수님, 한국분이 우리 학교에 오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근데… 혹시 한국 배우 수지 닮았다는 말 들어보셨어요?”
나는 예의상 웃어넘겼다.
중국 남자가 한국인을 우호적으로 생각해 주는 호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뼈박사는 자주 나를 챙겼다.
점심에 교수식당에서 나를 보면 꼭 옆자리에 와 앉았다.
예일대 박사 시절 이야기도 꺼내고, 그때 한국인 여학생과 가까웠던 적이 있다며 추억을 늘어놓았다.
“그분이랑은… 나중에 어떻게 됐어요?”
내 질문에 그는 짧게 말했다.
“나중은 없었죠.”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뼈박사와 나는 같은 교수아파트, 바로 위·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그 사실은 묘하게 불편했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정서적 거리는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니까.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자상함’은 조용히, 그리고 의도치 않게 선을 넘기 시작했다.
그날도 그가 두고 간 건 ‘친절’의 포장지를 쓴 작은 침투였다.
문 앞에 놓인 고급 과일 바구니와 함께 도착한 메시지.
“박 교수님, 저 혼자 사는데… 과일 같이 나눠 먹어요.
노크했는데 집에 안 계셔서, 문 앞에 두고 가요 (하트 이모티콘).”
친절인가, 신호인가.
그 둘 사이의 선은 생각보다 빨리 흐려졌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아주 은근하게 내 일상 속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논문 figure 정리가 어려운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데이터 분석이 막혀서요. 박 교수님 의견이 필요합니다.”
나는 선의이자 동료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그래서 도왔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연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간 되시면… 우리 집에서 차 한 잔 하실래요? (하트 이모티콘)
조용하고 이야기 나누기 좋습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문장 속에는 ‘가벼운 초대’와 ‘중대한 신호’가 동시에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그 한 문장 속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조용히 숨어 있었다.
혼자 산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그 초대가, 왜 나에게만 향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매번 정중하게 거절했다.
정말 이유는 단순했다.‘선’을 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단단히 그 거리를 지켰다.
나는 중국에 다른 명문대 즉 현 재직 중인 대학교에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이직이 결정되었다.
퇴사를 앞두고 정신없이 바쁘던 어느 날, 인사과 언니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박 교수님… 그분 말이에요.”
언니는 말끝을 흐리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결혼했어요. 아내가 있고, 애는 없고… 단지 가족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의 자상함, 챙겨줌, 말투 모두 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아주 덤덤하게 넘겼다. 왜였을까?
나는 이미 이직이 확정된 상태였고,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으며, 선을 지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자상함에 흔들리지도 않았고,
그 자상함 뒤에 숨었을지 모르는 다른 의도를 과도하게 오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일 적으로만 아는 동료”로 대했다.
그 경계가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상처받지 않았고, 그에게 상처를 돌려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한 발 물러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무난하게 정리되었다.
‘나중은 없었다.’
그의 말은 이번에도 그대로였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배워야 했던 ‘현실의 맥락’에 대한 이야기다.
고학력이라고 믿지 말 것.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
교양 있고 자상하다고 마음을 내어주지 말 것.
타국에서 살아보니, 진짜 조심해야 할 대상은 성별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었다.
남자조심. 여자조심. 사람조심.
그리고 무엇보다—내 삶의 원칙을 스스로 지킬 것.
그 원칙이야말로, 이방인의 땅에서 나를 가장 단단하게 지켜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며칠 뒤, 이직 수속을 밟고 인사과로 들렀을 때 언니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박 교수님, 역시 현명하세요. 그런 사람은… 일찍 걸러내야죠. 제가 괜히 걱정했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언니 덕분에 진짜 큰일 피했어요.”
언니는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여기서도, 어디서도… 박 교수님 행복하게 일해야죠.”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
타국에서 듣는 ‘괜찮아, 너 잘하고 있어’는 고향에서 듣는 말보다 더 깊이 스며드는 법이다.
타국에서 연구자로 살아간다는 건 늘 경계 위를 걷는 일이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정서의 리듬마저 다르기에
사람을 대할 때도 자연스럽게 ‘공사 구분’이 삶의 기본값이 된다.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배운 건 자상함보다 ‘온도의 조절’이었다.
거리를 둔다고 해서 차가운 건 아니고, 가까움을 허락한다고 해서 곧 신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곳에서의 인간관계는 온도 조절에 실패하는 순간 가볍게 흔들리거나 과하게 번지는 양쪽 끝으로 치닫곤 했다. 나는 이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나를 지키는 방식을 익혔다.
중국 생활의 장점은 분명하다.
최첨단 연구 시설, 해외 유수 대학 출신 과학자에 대한 탄탄한 처우,
그리고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 과학자로 살아가기엔 더없이 귀한 무대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장점 때문에 인간관계는 오히려 나에게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감정이 과하게 개입되지 않고, 남의 시선이나 기대에 휘둘리지 않고,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삶.
그것은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이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집중과 존엄을 지켜주는 방패였다.
실제로 중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과학자는 아직 많지 않다.
14억 인구의 대륙 한가운데, 20만 명 남짓한 한국인 중 하나로 살아가는 일.
주변에 한국인은 한 명도 없고, 모든 관계를 내가 직접 구축해야 한다.
외롭지 않지만, 고독하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왜 이곳에서 버티는가”를 묻고, 또 매일 그 답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단 하나의 진실이 선명해졌다.
언젠가 다시 누군가와 거리를 허무는 날이 온다면, 그 이유는 ‘자상함’이 아니라 ‘신뢰’ 일 것이다.
그 신뢰는 언어를 넘어, 문화와 역사를 넘어, 진심이 도달하는 자리에서만 피어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연구를 이어가며, 나를 잃지 않는 선택을 하며,
그 신뢰가 피어날 수 있는 사람을 향해 조용히, 단단하게 걸어가고 있다.
새로운 중국 명문 의대로 옮겨 온 지도 1년 반.
이곳에서 익숙해질 때쯤, 현 재직 대학교 인사과 언니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주선하는 싱글 교수 미팅이에요.
모두 남성 군의관 선생님들이 오신대요. 다들 정말 훌륭한 분들이래요.”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미소만 지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조용하고 단단한 답이 정해져 있었다.
—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다.
군 장교와의 만남은 정치적 맥락과 얽힐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복잡한 흐름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커리어를 쌓으러 왔다.
그리고 언젠가,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내 이름으로, 내 연구로 한국에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친절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주선’ 앞에서도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난다.
타국에서 배운 건 자상함보다 거리의 온도, 관계보다 내 삶의 방향이었다.
누군가가 선택해 주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인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