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도, 나는 여전히 과학자로 한국을 빛내고 싶다
나는 여러 번 연구를 그만두려 했다.
박사 때도, 포닥 때도, 지금도.
“이쯤에서 그만할까? 너무 벅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멈추지 않았다.
초심이 나를 붙잡았고, '과학자로서의 호연지기'가
나는 다시 길 위로 데려다 놓았다.
연구자의 길은 “하나를 해결하면 두 개가 새로 생기는”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수없이 좌절하고, 다시 세우고…
그렇게 여러 편의 논문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학자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도 깊어졌다.
강철 같은 멘털, 문제를 바라보는 관찰력, 데이터를 해석하는 인사이트,
아이디어를 진짜 ‘지식’으로 만드는 창의력—
그 모든 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좌절과 실패, 끈질긴 반복 속에서 조금씩 단단하게 쌓여
내가 연구라는 험한 산을 오를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
나는 여러 번 연구를 그만두려 했던 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박사 때도, 포닥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쯤에서 그만하자. 너무 벅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목소리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올라올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추지 않았다.
초심이 나를 붙잡았고, '과학자로서의 호연지기'가 나는 다시 길 위로 데려다 놓았다.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박사 후 연구원, 연구조교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모든 시간 동안
내 연구는 더 크게, 더 깊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Science·Nature·Cell 자매지 1 저자 전부를 달성하는,
이른바 ‘그랜드슬램’을 완성했다.
30대 초반, 나는 전임교수가 되었다.
한국도, 중국도, 세계도—지금은 ‘학력 인플레이션’의 시대다.
명문대 출신 박사도 넘치고, 좋은 논문은 세상이 이미 너무 많다.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단지 운이 아니라,
매일 나를 ‘관리하고 설계하는 힘’을 길러야 했다.
2022년, 전임교수 공개채용 시즌.
그해 나는 한국 대학에는 단 한 곳만 지원서를 냈고, 나머지 여섯 곳은 홍콩과 중국 대륙이었다.
한국은 연구 환경과 처우가 좋은 대학의 T.O. 자체가 적었고, 임용의 문은 너무 좁았다.
반면 중국은 14억 인구의 학령 규모에 비례해 전임교수의 수요 자체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실력, 운, 타이밍이 맞아떨어질 확률 역시 상대적으로 높았다.
한국에서의 나의 때는 오지 않았지만, 그 빈틈에 들어온 운이 중국 명문 의대 스카우트였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과, 전혀 다른 시스템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긴장감,
그리고 새로운 무대를 향한 설렘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러나 결국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를 독립 연구자로서 온전히 세울 수 있는 첫 무대가 되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과학자의 생존은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관리하고, 전략적으로 길을 설계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외고 시절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를 심도 있게 공부한 학생이었다.
그때 쌓은 기초는 시간이 흘러도 내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
미국 포닥 시절에는 영어로, 중국으로 이직한 뒤에는 다시 중국어로
거의 원어민처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는 한국계 2세로 ‘착각’될 만큼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했고,
지금 중국에서는 길을 묻거나 음식을 주문할 때조차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기에
중국어를 능숙하게 쓰는 것이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언어를 익힌 이유는 결코 ‘동화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연구를 확장하기 위한 도구,
그리고 치열한 커리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기였을 뿐이.
그래서 나는 강의도, 학회 발표도, 연구계획서와 연구보고서도 중국어로 완벽하게 소화하고,
국제 학술지용 논문은 다시 영어로 쓴다.
발음까지 현지인에 가깝다 보니, 동료들과 학생들은 종종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곤 한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나는 더욱 ‘한국인으로서의 나’를 선명하게 느낀다.
나의 하루의 결을 만드는 시간은 언제나 한국어였다.
매일 한국어 손글씨로 쓰는 감사일기,
작가의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수십 번 수정하는 브런치 글.
그 언어의 흐름이 멀리 떠나 있는 나를 다시 고향이라는 중심으로 데려왔다.
※ 바벨탑(Babel Tower): 인간이 하늘에 닿고자 쌓아 올린 야망의 탑.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전에 언어가 먼저 흩어지고, 뜻이 엇갈려 결국 미완으로 남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바벨탑은 오늘날,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흔들리는 정체성, 그럼에도 높이 오를수록 더 선명해지는 나 자신을 비추는 상징으로 불린다.
현지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나의 내면의 벽— 그 벽은 한국어를 사용할 때만 부드럽게 열렸다.
그들은 내가 중국어를 유창하게 쓰는 모습을 보며 “우리와 완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듯했다.
그러나 페르소나 아래에는 언제나 조용한 미세한 틈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한국어의 리듬으로 생각하고, 한국어의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학교 인사과의 직원들은 꾸준히 나에게 "좋은 인연을 소개해주고 싶다"라고 한다.
진심 어린 호의이지만, 나에게는 섬세한 압박처럼 느껴지곤 했다.
특히 올해 연말에는 학교·정부 차원에서 마련된
‘미혼 여성 교수 × 몇 스타 장교급 군의관’ 만남 자리에서
나를 1순위로 추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문득 숨이 막혔다.
중국에서는 군 장교가 주택·소득·교육·복지 등 모든 면에서 국가지원 엘리트다.
현지 미혼 여성에게 선호되는 직군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나는 그런 인연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인사과 언니는 만날 때마다 묻곤 했다.
“참석 메일 보냈어요? 꼭 가요, 정말 좋은 자리예요!”
나는 늘 미소로 매번 돌려 말했지만, 결국 어느 날 조용히 확답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지금 커리어가 더 중요합니다.”
반은 진심이었고,
나머지 반은 차마 드러내지 못한 나의 본심이었다.
내가 정말 두려웠던 것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내 삶의 뿌리가 이 나라에 묶이는 미래의 시뮬레이션이었다.
중국 군 장교와 인연을 맺는 순간 나는 법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이 나라에 ‘묶이게 된다’.
그 시뮬레이션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지옥 끝까지 가라앉았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나 정중하고 부드럽게 거절했지만 내면에서는 작은 분노의 파문이 일고 있었다는 것을.
언어의 장벽을 넘었다는 사실은 커리어 확장을 위한 전략이었지
내 정체성을 흩뜨리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그 나라의 언어로 연구하고 발표하지만
내 마음의 모국어는 여전히 한국어이며
내 가치의 뿌리는 한국에 닿아 있다.
나는 한국을 빛내고 싶은 과학자이고, 그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한국을 향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자리한다.
본의 아니게, 과학자의 삶이 나를 미국으로, 중국으로 밀어냈지만
그 타지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늘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코로나 시기, 세상이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멈춰 버렸던 그 고요에서 오히려 나는 다시 깨어났다.
‘마이다노’의 온라인 코칭, 한국어 영상으로 채운 홈트 루틴,
미국에서도 이어졌던 한국어 채팅 코칭.
채팅창 너머에서 한국인 코치가 보내오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은
그 어떤 피트니스 기술보다 더 깊은 위로로 다가왔다.
이국의 새벽 공기 속에서도,
나는 누군가와 한국어로 소소하게 소통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낯선 도시에서 단 하나의 익숙한 언어가 건네주는 온기—
그것은 운동 지도가 아니라
멀어져 가는 뿌리를 다시 묶어주는 은은한 생명의 끈이었다.
그 시간들은 단순한 루틴이 아니라 하루의 끝에서 나에게 건네는 조용한 다짐이었다.
“나는 오늘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중국의 대학에서 살아가는 나는 또다시 혼자만의 리듬을 정교하게 세우고 있다.
해외 살이는 이미 두 번째.
미국에 있을 때보다 더 단단하게, 더 고독을 품을 줄 알게 되었고, 더 혼자서 잘 살아내고 되었다.
이 정도면 해외 생활도 ‘경력’이 쌓여 그 자체로 전문성이 된다.
그러나 외로움과 고독의 결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럴 때마다 문득 한국 번호로 로밍된 전화가 울린다.
며칠 전에는 서울 집을 찾아온 도시가스 기사님이었다.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그분이었다.
“집에 계실 때 시간 맞춰서 점검하러 올게요.”
그 짧은 한국어 한 마디가 이상할 만큼 울컥했다.
"지금은 해외 근무 중이라, 나중에 집에 들어가면 미리 연락드릴게요."
기사님과 약속한 그 나중이 과연 언제가 될까?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너무 늦지 않게,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아침마다 나는 동쪽 창문을 향해
해돋이의 리듬을 타고 운동을 한다.
그 방향은 언제나—고국 대한민국이 있는 방향이다.
새벽 5시, 겨울의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간.
그럼에도 나는 이불속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세상은 잠들어 있지만, 나의 하루는 그보다 먼저 깨어난다.
홈트 매트를 펼치고, 동쪽 창문을 향해 선다.
그 방향은 언제나—고국 대한민국이 있는 방향이다.
아직 떠오르지 않은 해의 자리로 시선을 두고 나는 숨을 고르고, 몸을 깨우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운동의 시작되면 해돋이가 어둠을 밀어내듯 내 안의 주저함도 천천히 빛으로 바뀐다.
“오늘 하루를 더 빨리, 더 단단히 쌓아야
내가 한국에 다시 돌아갈 힘을 갖게 돼.”
그 신념이 나를 다시 하루로, 다시 운동으로, 다시 나 자신으로 데려온다.
한국을 향한 귀소본능은, 내가 멈추려 할 때마다 제일 먼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한국으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은 욕심일까,
뿌리를 향한 귀소본능일가
나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그 땅에 서서 연구자로, 전임교수로,
한국의 학문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이 되고 싶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의 진실은 늘 단순하지 않다.
한국은 좁고,
경쟁은 치열하며,
조직 문화는 날카롭고,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대학원 시절 악질 K 선배에게 당했던 갈굼과 태움,
친구들이 토해내던 번아웃의 한숨, “탈조선”을 외치던 절규 같은 밤들.
그 모든 기억이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을 싸늘하게 한다.
한국에서 다시 교수로 산다는 건, 내가 바라는 행복의 형태일까?
아니면 또 다른 ‘궁’에 갇히게 될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어디서 살든, 나를 잃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지켜온, 그리고 앞으로도 지켜갈 과학자의 호연지기다.
문득 학창 시절, TV에서 방송하던 드라마 <대장금>의 명장면이 떠올랐다.
죽음을 앞둔 정상궁은 제자 장금에게 남긴 마지막 말.
“나는 평생을 이 궁 안에서만 살았다.
궁 밖 세상은 제대로 구경도 못 해봤지.
그러니, 내가 죽거든… 궁의 좁은 흙에 묻지 말거라.
나는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저 넓은 세상 위로 흩어지고 싶다.
장금아, 나를 구름 위에 뿌려다오.
너는… 너만은 꼭, 궁이라는 틀에 묶이지 말고, 네 길을 가거라, 네 삶을 살아라."
그 유언은 한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도달하는 자유에 대한 마지막 고백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시간이 흘러도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한국이라는 '궁'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
미국에서, 중국에서 과학자로 연구했고, 살아냈고, 버텨냈다.
그것은 도망도 아니고, 방황도 아니었다.
궁에 갇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발걸음이었고,
더 큰 세게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내 연구와 삶을 확장한 여행이었다.
그래서 확신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나는 이미 ‘궁 밖의 세계’를 살아낸 사람이라는 것을.
그 경험이 이번 생을 충분히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과학자의 길은 늘 벼랑 끝을 오르는 일과 닮아 있다.
거칠고, 고독하고, 종종 가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운동 덕분에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지칠 때도, 꺾일 때도, 슬픔이 고여 숨이 막힐 때도
운동은 나를 다시 ‘수평선’ 위로 끌어올렸다.
몸이 단단해지자 나는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고,
글을 계속 쓸 수 있었고,
낯선 도시에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그것은 '과학자' 또는 '교수'라는 명함을 넘어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한국에서 살든, 중국에 머물든, 혹은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가든—
내가 지켜야 할 단 한 가지는
어디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나의 중심,
세계 어디에 있어도 과학자로 한국을 빛내고 싶은 뜨거운 포부,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안에 숨 쉬는 호연지기.
긴 여정이었습니다.
브런치북 <나는 여전히 한국을 빛내고 싶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함께 걸어와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이 제목에는 두 겹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낯선 땅에서도 한국인으로서의 품격을 지키고자 하는 정체성,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에 기여하고자 하는 책임감.
이 두 마음이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저를 지탱해 왔니다.
저의 필명 ‘박주영’은 아버지의 성(姓)과 어머니의 이름이 하나로 이어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자연인이자 과학기술인인 본명으로 게재한 여러 편의 국제학술 논문이
이미 생물학정보연구센터 BRIC ‘한빛사’(한국을 빛내는 사람들) 논문으로 선정되어 왔고,
앞으로도 저는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그 믿음과 다짐을, 이 연재 속에 담았습니다.
제 여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해외에서든, 언젠가 고국으로 금의환향해서든 저는 한국을 빛내는 사람으로 존재하고자
오늘도 묵묵히 나아갑니다.
독자님들께 조심스레 묻고 싶습니다.
낯선 국가에서 홀로 연구자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한 한국인 여성 과학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여러분은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한국을 떠나와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현지에서 주선된 소개 미팅까지
"내 길에 집중하고 싶어서" 정중히 거절하며 혼자의 길을 선택한 삶,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오만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아무 말이라도 괜찮습니다.
그 진심 어린 한마디가 저에게는 큰 용기가 될 것입니다.
‘낭만닥터 김사부’를 빌리자면,
애국 과학자의 낭만으로 봐주셔도 좋고,
조금 더 솔직하게 “개 멋 부린다”라고 웃어주셔도 좋습니다.
단 하나, 그 멋 부림의 방향이 틀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저는 흔들림 없이 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