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 혐오, 그 너머의 이해로
나는 공산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한’ 공산주의, ‘완전한’ 사회주의라는 모델 자체는 이론적으로 꽤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사회가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말이다.
문제는 언제나 ‘적용’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조차 완전한 형태로 실현하지 못한다. 직접 민주주의는 규모의 한계와 인간의 피로 앞에서 수정되었고, 결국 간접 민주주의와 대의 구조라는 타협 위에 서 있다. 민주주의가 열등해서가 아니라, 인간 사회가 완전한 이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많은 마찰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민주주의조차 수정과 간접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현실에서, 훨씬 더 높은 도덕성과 합의를 요구하는 ‘완전 공산주의’는 과연 몇 세기 안에 실현 가능한가?
몇 세기를 주더라도, 불가능하다.
시간이 아무리 주어진다 해도, 인간의 지속력은 격변이 요구하는 인고를 감내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짜로 공산주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혁명도, 적대도, 체제 파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간극과 대립,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이상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모듈을 설계하고, 검증하고, 증명하는 일이다. 이것이 없다면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신앙이 되고, 정치는 종교가 된다.
여기서 폭력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논리는 무너진다.
이론적 검증 없이 사상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실험이며, 그 실험을 타인의 삶 위에 강제로 올려놓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더구나 반대 세력을 폭력으로 탄압한다면, 그것은 담보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확실한 피해를 강요하는 일이다. 이것을 정치나 혁명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그것은 테러리즘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한 많은 국가와 단체는 공산주의를 윤리의 문제로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분배와 사회 유지를 위한 기술로 취급했고, 윤리와 도덕은 ‘혁명 이후’로 미뤄두었다.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절대 윤리가 아니라, 효율과 통제였다.
내가 공산주의를 이상적으로 옳다고 여길 수 있는 이유는 정반대 지점에 있다. 공산주의가 윤리와 도덕을 사회 규범으로 기동시킬 가능성을 지닌 사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분배를 위해 윤리를 희생하는 체제가 아니라, 윤리를 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공산주의다. 이 둘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다.
한편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을 최종 목표로 삼아왔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공리주의적 운영 방식을 채택했고, 이는 현실과 사상의 간극을 인정하는 체계로 작동해왔다. 윤리적 손실은 존재하지만,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설득력을 가진다.
반면 공산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이라는 논리 바깥에 있다. ‘능력에 따른 생산,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이념은 표면적으로 공리주의와 닮아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수요에 따른 분배는 단순한 쾌락의 극대화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최소한의 분배를 전제로 한다. 이는 다수가 최대 이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분배하는 방식과는 구분된다.
이 지점에서 공산주의는 윤리적 체계로 해석될 여지를 갖는다. 자본주의가 잠재적 이익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현재의 효율에 집중한다면, 윤리적 정합성을 띤 공산주의는 최종적 이익을 위해 잉여 자원을 투자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익이 있기에 윤리적인 자본주의’와 ‘윤리적이기에 이익이 가능한 공산주의’의 차이는 여기서 드러난다.
다만 분명한 한계도 있다. 완전한 윤리적 판단과 투자를 담보하는 정치 체계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공산주의는 어디까지나 이상적 이론일 뿐, 그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순간, 사상은 현실과의 연결을 상실한다.
그래서 나는 연구와 탐구를 악으로 분류하는 사회를 경계한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철학적 사고를 정치적 불온으로 취급하는 순간, 그 사회는 스스로 사고 능력을 포기한다.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것과 공산화를 실행하는 것은 다르다. 사상을 이해하는 것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물론 연구자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신의 사상과 철학이 사회에서 불온으로 인식될 가능성을 항상 전제해야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선’이 그 사상을 주장하고 실행하려는 행위 자체가 초래할 수 있는 ‘악’보다 과연 더 큰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윤리를 말하면서 윤리를 파괴하는 순간, 사상은 스스로를 배반한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하다.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폭력으로 현실에 강제하는 순간, 그 사상은 어떤 이름을 달고 있든 순수한 악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폭력을 막기 위해서야말로 우리는 사유와 연구의 자유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
사상을 금지해서 사회가 안전해진 적은 없다.
생각을 멈춘 사회는 언제나, 더 나쁜 방식으로 폭력에 도달해 왔다. 현대 사회에서 사상적 다양성과 호기심은 역사적 분쟁의 사실들에 의해 혐오받고 차단되어왔다. 그러나 사유와 탐구가 아름다운 까닭은, 최종적으로 주제를 이해하고 장단을 예측할 수 있음에 있다. 따라서 마치 중세의 종교가 토속 신앙을 배척하듯 처리할 것이 아닌, 진정한 이해를 담보로 사회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사상에 대한 연구를 존중해야 된다. 그것이 자유로운 사회, 윤리적인 사회의 기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