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형에 반대하는가

책임윤리, 그리고 죽음의 특이성

by 박현

사형에 대한 논의는 늘 감정으로 시작된다.

끔찍한 범죄, 설명할 수 없는 분노, 그리고 “저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직관.

이 감정은 이해 가능하다. 인간이라면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사형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범죄자에 대한 연민도,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도 아니다.

칸트의 논리를 빌려서도 아니며

베카리아의 논지를 인용해서도 아니다.


죽음은 인간이 책임질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책임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윤리적으로 지켜야 할 가장 막중한 의무이다.

그러나 죽음은 책임의 대상이 아니다.

책임이라는 개념에는 전제가 있다.

잘못이 확인되면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하고,

오판이 드러나면 중단하거나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보상이 가능해야 한다.


벌금형은 환급할 수 있고,

징역형은 석방할 수 있으며,

종신형조차 중단과 보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죽음은 다르다.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책임의 회로는 완전히 끊어진다.

오판이 확인되더라도 더 이상 대상은 이 세상에 없다.

그 어떠한 상호작용도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특이성이다.

완벽한 단절은 오로지 죽음으로만 생성된다.


유족에 대한 배상이나 사과,

죽은 이를 기리는 의식은

모두 산 사람을 위한 장치일 뿐,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사형은 처벌이 아니라 책임의 포기가 된다.


책임의 부재에 따르는 윤리적 손실은 지대하다.

미미한 오판의 가능성이 있다해도

이에 막대한 윤리적 대가가 곱해지면

결과인 ‘기대손실’은 사형을 포기할 근거가 될 정도로

큰 값을 지닌다.



“그럼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사형에 찬성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그럼 그런 인간도 살려둬야 하느냐?”


이 질문에는 분노와 혐오가 섞여 있다.

나는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피해자가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을 경우,

사형을 요구하는 마음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윤리는 감정의 정당화가 아니다.

윤리는 감정을 넘어서도 유지되어야 할 기준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형보다 더 가혹한 처벌은 가능하다.

베카리아가 주장한 종신노역형처럼,

삶 전체를 책임의 장 안에 가두는 형벌 말이다.


살아 있는 한,

그는 책임을 지고,

오판이 밝혀질 가능성 또한 남아 있다.


이것이 사형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법은 윤리의 최소치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법을 지켰으니 윤리적이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법은 윤리의 완성형이 아니라

윤리가 붕괴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사형은 이 최소치조차 위반한다.

법이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순간,

법은 책임을 질 수 없는 영역까지 손을 뻗는다.


이는 정의의 과잉이지, 정의의 실현이 아니다.



사형 반대는 관용이 아니라 절제다

나는 사형을 반대하지만,

범죄자를 이해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의 고통을 헤아리자는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감히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제도로 만들지 말자는 입장이다.


사형을 반대하는 것은

인간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형은 너무 간단하다.

너무 빨리 끝나고,

너무 완벽하게 책임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윤리는 불편해야 한다.

끝까지 책임을 붙잡고 놓지 않는 태도여야 한다.


죽음은 예외다.

그 예외를 제도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정의가 아니라 면책을 설계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형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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