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진리의 좌표, 그리고 백터

우리는 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by 박현


나는 종종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려 할 때마다, 진리를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한계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 글은 진리를 규정하거나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다만 내가 진리를 어떻게 상정하고 있고, 왜 사람마다 진리에 대한 결론이 다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 방식이다. 일종의 번역에 가깝다. 추상적인 사유를, 오늘날 사람들이 비교적 익숙한 언어로 옮겨보려는 시도다.


내가 상정하는 진리는 흔히 말하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과 닮아 있다. 다만 형이상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인식 구조의 문제로 이해한다. 핵심은 단순하다. 어떤 차원의 진리는, 그와 동일한 차원의 개념으로는 완전히 포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 차원 위의 개념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낄 때조차, 그 이해는 언제나 한 단계 아래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n차원의 진리는 적어도, n+1차원의 개념을 통해서나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좌표의 비유로 설명해보자. 우리가 이차원 평면 위에 서 있다고 가정해보면, 우리는 x와 y라는 두 값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하지만 진리가 실제로는 x와 y뿐 아니라 z까지 포함하는 지점에 있다면, 우리는 그 진리에 도달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떤 지점에 도착했을 때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려면, 이미 그 진리에 도달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놓치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한다. 진리는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접근할 수 있는 인식 차원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확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흔히 이런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가 접근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모든 진리 탐색자가 같은 좌표계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활 조건, 경험, 사고 습관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의 사고와 삶의 범위는 특정 구간에 집중되어 있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구간에서 세계를 해석한다. 만약 진리가 특정 지점에 존재한다면, 정합적인 진리 탐색자들 조차 각자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으로 수렴할 뿐이다. 그 결과는 서로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일차원적 세계관에서 진리의 한 좌표가 (3)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누군가는 (0~2)의 좌표계를 지닌다. 또 다른 누군가는 (4~7)의 좌표계를 지닐 수 있다. 이 때, 충분한 논리적 사고를 거쳐 전자는 (2)로, 후자는 (4)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각각의 좌표계에서 진리의 일부인 (3)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의견의 불일치는 반드시 거짓이나 무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각자가 자신이 접근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진리에 접근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주장이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오류라고 부르는 것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좌표의 차이에서 비롯된 접근 방식의 차이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나는 철학이나 윤리를 쉽게 폐기하지 않는다. 어떤 사상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태도는, 진리를 너무 쉽게 단정하는 태도에 가깝다. 우리는 아직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심지어 우리가 진리를 스쳐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차원은 제한되어 있고, 진리는 그 바깥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배제보다 축적이다.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논리, 멈추거나 우회해야 한다는 논리까지 모두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벡터를 축적하는 일이다.


이때 철학과 사상은 정답이 아니라 측정값이 된다. 어떤 사상은 진리에 미달한 값일 수 있고, 어떤 사상은 지나친 값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상은 측면에서 접근한 값일 수도 있다. 충분히 많은 측정값이 쌓일수록 우리는 평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윤곽을 얻게 된다. 진리를 정확히 포착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디쯤에 있는지는 가늠할 수 있게 된다. 2차원인 면에 표시된 한 점은 1차원의 선 시점에서는 전혀 인지가 불가능하다. 다만, ’정합성의 귀결이 곧 진리이다‘라는 개념 덕분에 진리의 일부 좌표는 백터값들의 조합으로 예측해낼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논리적 사유를 기반으로 예측해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흔히 현학이라고 불리는 태도다. 이 태도의 핵심 문제는 지식의 양이나 고전의 인용이 아니라 적용 방식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좌표계에서 생성된 사유를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 그 사유가 생성되었을 좌표계에는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리에 가까워지는 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같은 방향의 이동이 오히려 진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예시로, (0~2)에서의 논리가 (2)로 수렴해 진리좌표 (3)에 근접해가는 벡터를 지닌다. 이 때, 증가방향으로 벡터가 형성된다는 방향성만을 체택해 (4~7)이 증가하길 택할 경우, 진리좌표 3에서 멀어지게 된다. 진리에 대해 형성된 지식 그 자체를 숭상한 결과, 의도와 달리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철학의 실패가 아니라, 좌표를 고려하지 않은 적용의 실패다. 따라서 타인의 논리는 그 자체로 존중되며 고려되어야 할 것이지, 적절한 파악이 부재된 상황에서 흡수와 동일화를 지향해서는 안된다.


이 글에서 내가 제시한 모델은 내 진리관을 완벽히 설명하거나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구조를 하나의 대표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추상적인 언어보다 수와 공간, 위치와 방향의 개념에 더 익숙하다. 그렇기에 이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진리는 이 모델 안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델은 진리를 가리키는 방향표 정도의 역할만 수행한다.


결국 진리 탐색은 설득이나 승부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진리를 말하는 순간, 진리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진리는 이해받지 않아도 존재하고, 동의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자의 좌표에서 가장 정합적인 방향을 찾고, 그 방향으로 조용히 이동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와 책임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나는 그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는 각오로 이 사고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작가의 이전글현대미술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