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을 지켜내는 유치원 교사의 이야기
2022년 3월 1일 - 서른 살의 동심
서른 살의 동심
내가 2002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비단 월드컵 때문만이 아니다.
2002년, 열 살인 나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2002년 11월 1일 금요일
제목: 20년 후에의 만남 약속
짝을 바꾸고 나니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2022년 3월 1일 삼일절에 3시 1분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자는 내용.... 우리가 20년 뒤의 약속이다. (… 중략…)
그 당시에는 휴대전화도 잘 없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말로만 하는 ‘구두’ 약속이 너무나 익숙한 때였다. 열 살에게 서른 살은 너무 먼 미래 같았지만, 어린이에게 서른 살의 약속은 동심 가득히 설레는 일이었다. 20년 후에 또 우리가 만날 수 있다니! 친구들이 어른이 된 모습, 선생님을 또 만나 뵐 수 있다는 생각에 약속한 그날부터 난 두근거렸다. 그날 밤 집에 와 이 잊지 못할 약속을 일기장에 적었던 것 같다.
3학년 1반이기 때문에 3월 1일 삼일절 3시 1분에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은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삼일절마다 몇 년이 남았는지 세어보기도 하고, 나처럼 기억하는 친구들이 있을지 걱정과 고민도 해보면서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20년이 지난, 2022년 3월 1일. 삼일절.
마냥 기다려온 날이었지만, 왠지 모를 걱정이 앞섰다.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가볼까? 가지 말까?’ 막상 날이 다가오니 설렘과 걱정이 반복되었다. 아직 나는 초등학교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3시 1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운동장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다. 그때, 한 남자가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를 못 알아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혹시 3학년..”
“어? 3학년 1반!”
그렇게 20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기나긴 시간 동안 연락 한 번 없이 20년 전 약속으로 말이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둘이서 조금 더 기다렸지만, 선생님과 다른 친구들은 만날 수 없었다. 비록 단 둘 뿐인 만남이었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감동적이었다. 친구도 매년 삼일절마다 이 순간을 떠올렸다고 했다.
교사가 된 지금, 나도 20년 후의 만남을 약속해 보면 어떨까 상상하곤 하지만 사실 유치원 아이들 특성상 너무 어려 유치원 시절을 잊는 어린이들이 많다. 몇 년 후면 나를 잊거나 유치원에서 함께 했던 추억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조금 달라졌다.
초등학생이 되어 핸드폰이 생긴 아이들이 종종 나를 기억하고 동심이 가득한 연락을 보내오곤 한다.
“선생님, 서아예요. 잘 지내셨나요?”
“선생님, 그 유치원 때 놀이시간 되면 노래 틀어주셨잖아요 그거 이름이 뭐예요?”
“우리 안 본 지 3년이나 되었어요ㅠㅠ”
좋은 세상 덕분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동심 가득한 연락이 오곤 한다. 귀엽고 소중한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나는 성심성의껏 답장한다. 날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겐 절대 남들에겐 보여주지도 못할 나의 셀카를 보내주고, 좋은 소식엔 최대한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격한 리액션을 보내준다. 지금의 이런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여야 나중의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도 동심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처럼 말이다.
교사의 말 한마디를 20년간 마음속에 간직하고 묵묵히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 나와 친구가 있는 것처럼 긴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나의 한마디로 동심을 추억하는 날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이들에게도 한 마디가 변화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또 간절히 소망하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동심을 지키는 교사로서의 책임이 막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