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의 칼날 아래 스러지는 세계

제2부: 거대한 분리: 이성의 왕좌, 감응의 추방

by 한재영

제4장 텅 빈 방 안의 유령, 생각하는 나


2절. 의심의 칼날 아래 스러지는 세계


데카르트가 시작한 작업은 단순한 회의나 투덜거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낡고 위태로운 건물을 폭파하기 전에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건축가의 해체 작업과 같았다.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덧쌓아 올린, 겉보기에는 웅장하지만 기초가 부실하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지식의 성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새로운 이성의 성채를 오직 확실한 기초 위에 다시 짓기 위한, 철저하고 체계적인 파괴. 그는 의심이라는 무자비하고 예리한 칼날을 들고, 자신이 이제껏 진리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가차 없이 심판대 위에 올렸다.


데카르트의 의심에는 규칙이 있었다. 그는 ‘틀릴 수 있는 것’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틀릴 가능성이 있는 것’은 모두 진리의 자격을 박탈했다. 확률이 아니라 확실성만을 남기겠다는, 잔인한 기준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아마도”를 모조리 추방하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의심할 수 있다면, 그건 아직 기초가 아니다. 기초는 의심이 다가설수록 더 단단해져야 한다. 그는 그 단단함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실험대에 올려놓기로 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자,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거의 유일한 통로인 ‘감각(senses)’을 의심의 법정에 세웠다. 그의 독백은 벽난로의 타닥거리는 소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내가 아는 것들의 대부분은 감각을 통해 얻었거나, 최소한 감각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감각이라는 녀석이 때로는 나를 기만하고 속인다는 것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나의 눈은 얼마나 자주 나를 속였던가! 맑은 물에 곧게 꽂은 막대기는 어이없게도 굽어 보이고, 저 멀리 들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은 실제로는 위압적인 사각형의 석조 건물인데도 내 눈에는 작고 둥근 귀여운 비둘기집처럼 보인다. 뜨거운 여름날 광야의 신기루는 존재하지 않는 시원한 오아시스의 환영을 보여주어 목마른 나그네를 절망으로 이끌고,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속삭임과 섬뜩한 형상을 보고 듣는다. 나의 감각이 나를 단 한 번이라도 속인 적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절대적으로, 언제나 신뢰할 수 있겠는가? 마치 거짓말을 한 번이라도 한 친구를 다시는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이미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자들이 지겹도록 제기했던 오래된 문제였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단순히 감각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 의심을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차원으로 밀고 나아간다.


“하지만 어쩌면 아주 작은 것, 아주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만 감각이 나를 속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여기, 이 따뜻한 난롯가에 앉아 있고, 내 손으로 이 부드러운 종이를 만지고 있으며, 내 눈앞에 이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다는 이 명백하고 직접적인 사실까지 의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잠시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 안락하고 확실해 보이는 확신마저 무너뜨리는, 훨씬 더 강력한 의심의 망치를 휘두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꾸는 동안에도 똑같은, 아니 때로는 훨씬 더 생생하고 강렬한 경험들을 겪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꿈속에서도 나는 불을 쬐고, 책을 읽고, 심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금 느끼는 것과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생생한 감각들을 느끼지 않았던가? 꿈속의 나는 내가 지금 완벽하게 깨어있다고 굳게 믿었지만, 다음 날 아침 차가운 침대 위에서 눈을 뜨면 그 모든 것이 하룻밤의 덧없는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깨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100% 확신할 수 있는가?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경험이, 사실은 내 침대 속에서 아주 길고 정교하게 꾸고 있는 또 다른 꿈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결코 틀리지 않는 확실하고 객관적인 표지가 과연 존재하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런 절대적인 표지는 없는 것 같다.”


바로 이 치명적인 ‘꿈의 논증(Dream Argument)’을 통해, 데카르트의 의심은 감각의 사소한 오류 가능성을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 전체의 존재 자체를 겨누는 거대한 공성추가 된다. 내가 지금 보고 만지고 느끼는 이 모든 것—따뜻한 난로의 온기, 손에 들린 펜의 무게감, 삐걱거리는 낡은 의자의 감촉, 창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겨울나무의 풍경—이 사실은 내 아늑한 침대 속에서 꾸고 있는 한바탕 길고 생생하며 완벽하게 일관성 있는 꿈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이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제거할 수 없다면, 외부 세계의 존재 자체는 더 이상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는 개연성의 문제로 전락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1장의 사냥꾼이 눈보라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처절하게 확인시켜 주었던 그 생생하고 강력한 ‘살갗의 고통’은 이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믿을 수 없는 불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고통과 쾌락,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포만감. 그 모든 원초적이고 강력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던 감각들은 이제 진리를 비추는 창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고 우리를 속이는 흐릿하고 얼룩진 유리창일 뿐이었다. 감응하는 육신은 그렇게, 절대적 확실성을 향한 이성의 고독한 여정에서 가장 먼저 추방당하는 불명예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1장의 사냥꾼에게 고통은 ‘내가 아직 살아있고, 나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존재의 이유를 상기시키고 정당화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고통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지 않다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의심의 근거일 뿐이었다. ‘정당화’의 세계가 ‘설명’의 세계 아래로, ‘감응’이 ‘이성’ 아래로 종속되는 거대한 지각 변동, 서구 문명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분리가 바로 여기서 확정된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 전체, 그리고 그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학적 진리마저 의심의 도마 위에 올렸다. 꿈의 논증이 외부 세계의 존재를 불확실하게 만들었다면, 그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령 내가 지금 깨어있다 하더라도 이 세계가 내가 인식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보장이 있는지를, 그리고 심지어 2 더하기 3이 5라는 명백해 보이는 진리마저도 확실한 것인지를 묻는다. 그는 이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전복적인 의심으로 치닫는다.


“꿈이 아무리 정교하다 해도 그것은 화가가 그린 그림과 같다. 화가가 캔버스 위에 인어(Mermaid)나 사티로스 같은 상상의 괴물을 그려낼 때조차, 그들이 사용하는 색깔이나 선, 기본적인 형태까지 완전히 무에서 창조해낼 수는 없다. 그들은 현실에 있는 팔과 다리, 물고기의 꼬리를 조합할 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요소들—연장(Extension), 모양, 크기, 그리고 수(Number)—만큼은 꿈속에서도 여전히 참된 것이 아닐까? 물리학이나 천문학처럼 복잡한 사물을 다루는 학문은 의심스러울지 몰라도, 사각형의 변이 네 개라는 기하학의 진리나, 2 더하기 3이 5라는 산술의 진리는 내가 깨어있든 잠들어 있든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처럼 보인다.” 데카르트는 절실한 마음으로 이 마지막 희망, 이성의 최후 보루인 수학적 진리라는 밧줄을 꽉 붙잡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그 밧줄마저 놓아버린다.


“전능하고 선하다고 알려진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만약 그 신이 아니라, 신만큼 전능하지만 극도로 사악하고 교활한 어떤 존재, 악마(malin génie)가 실제로 존재하여, 그의 모든 힘과 지능을 오직 나 하나를 속이는 데만 사용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저 푸른 하늘, 저 부드러운 공기, 이 단단한 땅과 내 몸의 모든 감각들, 심지어 내 몸 자체가 사실은 그 악마가 내 정신 속에 직접 투사하고 있는 한 편의 정교하고 완벽한 환상, (마치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매트릭스’와 같은 거대한 가상현실이라면?) 내가 2 더하기 3이 5라고 너무나 명백하게 계산할 때마다, 사실은 그 악마가 내 정신을 교묘하게 조종하여 틀린 답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면? 모든 논리와 수학의 법칙 자체가 사실은 그 악마가 만들어낸 거대한 속임수 게임의 규칙에 불과하다면?”


이 무시무시한 ‘사악한 악마 가설(Evil Demon Hypothesis)’은 단순한 편집광적인 망상이 아니다. 이것은 의심이라는 칼날을 인간 이성의 가장 깊고 신성한 영역, 즉 감각 경험과 무관하게 참이라고 여겨졌던 논리와 수학의 영역까지 밀어 넣는 극단적인 사고 실험이다. 꿈의 논증은 감각의 세계를 파괴했지만, ‘2+3=5’와 같은 수학적 진리나 ‘사각형은 네 개의 변을 가진다’와 같은 기하학적 정의는 꿈속에서도 여전히 참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악한 악마는 바로 그 이성의 마지막 보루마저 파괴해 버린다. 내가 가장 명석(明晰)하고 판명(判明)하게 진리라고 믿는 것조차도, 사실은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강력한 존재가 내 정신 속에 심어놓은 거대한 착각일 수 있다는 끔찍한 가능성.


이 무서운 가설 앞에서, 2장에서 부족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세계에 질서를 부여했던 ‘동굴의 약속’과 그 위에 세워진 모든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도 이제 한낱 덧없는 꿈이거나 사악한 악마의 잔인한 장난일지도 모르는 것으로 전락했다. 신의 존재마저도 악마의 속임수일 가능성 앞에서 불확실해졌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나의 몸도, 저 바깥의 세계도, 심지어 이성의 가장 확실한 법칙과 신의 존재마저도 의심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속절없이 스러졌다. 데카르트는 이제 완전한 허무,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믿을 수 없는 텅 빈 인식론적 암흑 속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이제 아테네 아고라의 철학자보다, 빙하기 동굴 속의 원시인보다 더 근원적인 고독 속에 갇혔다.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수행한 ‘방법적 회의’의 파괴적이면서도 동시에 창조적인 힘이다. 그는 단순히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수동적으로 말하는 고대의 회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낡고 불확실한 세계를 남김없이 파괴하는 혁명가였다. 그는 이제 인류가 수천 년간 힘들게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의 도서관을, 그 안에 담긴 모든 신성한 경전과 과학 이론들을 남김없이 불태워버렸다. 남은 것은 오직 시커먼 잿더미와 그 한가운데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뿐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바로 이 완전한 절망과 허무의 지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위대한 반전, 새로운 시대를 여는 단 하나의 확실성이 기적처럼 떠오른다.

이전 05화무너진 세계, 단 하나의 주춧돌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