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거대한 분리: 이성의 왕좌, 감응의 추방
제4장 텅 빈 방 안의 유령, 생각하는 나
3절. 코기토, 고독한 왕의 탄생
의심의 칼날은 모든 것을 베어버렸다. 데카르트가 십수 년간 자신의 정신 안에 쌓아 올렸던 화려한 지식의 성채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교활한 배신자였고,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견고해 보이는 세계는 한바탕 길고 지독한 꿈이거나 사악한 악마가 상영하는 정교한 속임수일지 몰랐다. 2 더하기 3이 5라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해 보였던 수학적 진리마저도, 전능한 악마가 우리의 정신을 교묘하게 조종하여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것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나의 몸도, 저 바깥의 세계도, 심지어 이성의 가장 확실한 법칙마저도 의심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속절없이 스러졌다.
데카르트는 이제 완전한 허무,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믿을 수 없는 텅 빈 암흑 속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이제 아테네 아고라에서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던 철학자보다, 빙하기의 어두운 동굴 속 원시인보다 더 근원적이고 처절한 고독 속에 갇혔다.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 거대한 속임수의 일부가 아닐까?’
이것은 더 이상 차가운 지적 유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발 디딜 곳 없이 바닥 없는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생생한 실존적 공포였다. 만약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진리를 향한 모든 노력이 결국 헛된 것이라면, 삶의 의미는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데카르트는 마치 칠흑 같은 바다 한가운데서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산산조각 나고, 붙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나무 조각도 없이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때, 그 거대한 의심의 폐허 속에서, 그 칠흑 같은 허무의 바다 한가운데서, 그 어떤 사악한 악마의 힘으로도 결코 의심하게 만들 수 없는 단 하나의 사실이, 마치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섬광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지금 이 순간, 처절하게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 깨달음은 논리적 추론의 끝에서 도출된 결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번개처럼, 순간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명증함으로 그의 정신을 강타했다. 데카르트는 그것을 ‘추론했다’기보다, ‘발견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발견이 아니라 드러남이었다. 마치 안개로 가득 찬 폐허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홀로 서 있는 하나의 기둥이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것처럼. 그는 그것을 의심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시도 자체가 이미 그 기둥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즉시 드러낼 뿐이었다.
‘내가 나의 감각을 의심하고, 세계의 존재를 의심하고, 심지어 사악한 악마에게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는 대체 무엇인가? 내가 속고 있든, 꿈을 꾸고 있든, 혹은 미쳐가고 있든,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이 행위 자체는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속임을 당할 수도 없고, 꿈을 꿀 수도 없으며, 의심하거나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내가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하고 절대적인 증거다.‘
의심의 칼날은 세상 모든 것을 베었지만, 정작 그 서슬 퍼런 칼을 휘두르고 있는 손, 즉 의심하는 행위 자체는 결코 벨 수 없었다. 생각이라는 행위는, 그 생각의 내용이 모두 거짓이고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주체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증명했다. 사악한 악마는 내가 보고 있는 이 난롯불이 사실은 차가운 얼음이라고 속일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속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 속임수를 당하고 있는 ‘나’가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 이 명백하고 단순한 논리적 귀결은 그 어떤 악마의 전능한 힘으로도 흔들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였다.
마침내 데카르트는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강력하며,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위험하기까지 한 위대한 명제를, 마치 어둠 속에서 마침내 발견한 단 하나의 촛불을 켜듯 선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것은 위대한 발견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렸다면, 데카르트는 인간의 ‘생각하는 자아’를 지식의 새로운 중심으로 선포했다. 혼돈의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돌던 근대의 인류는 마침내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의 닻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르키메데스의 점’이었다. 이 단 하나의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 위에, 그는 이제 무너진 지식의 세계를 수학의 질서처럼 명석하고 단단하게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이 확실성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어떤 외부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신의 계시도, 전통의 권위도, 공동체의 합의도 필요 없었다. 오직 ‘나’ 혼자서, 나의 사유만으로, 나는 나의 존재를 증명해냈다. 이것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승리였지만, 동시에 인간을 전례 없는 고독 속으로 밀어 넣는 승리이기도 했다. 이제 진리는 더 이상 ‘함께 믿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확실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동시에, 이것은 인류의 운명을 바꾼 비극적인 선언이기도 했다. 여기서 존재가 증명된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팔다리를 가지고, 심장이 뛰며, 눈보라 속에서 살을 에는 고통을 느끼고, 동굴 속 가족의 얼굴을 보며 뜨거운 사랑을 느끼는 1장의 ‘감응하는 육신’이 아니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이미 그 모든 것을 ‘꿈일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하여 가차 없이 폐기해버렸다. 여기서 존재가 증명된 ‘나’는 오직 ‘생각하는 것(res cogitans)’, 즉 순수하고 비물질적인 정신적 실체뿐이었다.
‘생각한다(Cogito)’는 말은 단순히 논리적 추론만을 의미하는 좁은 개념이 아니었다. 데카르트에게 그것은 의심하고, 이해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욕하고, 거부하며, 상상하고, 느끼는(여기서 느낌이란, 고통이나 기쁨 같은 육체적 감각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정신적 작용을 의미한다) 모든 종류의 의식 활동을 포함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모든 활동이 육체 없이도, 심지어 세계 없이도 가능한, 순수하게 정신적인 작용이라는 사실이다. 사유는 마침내 육체라는 불확실하고 더러운 감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하여,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증명해 낸 것이다.
이 순간, 플라톤이 처음으로 갈라놓았던, 수천 년간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생각하는 ‘나(주체, 정신)’와, 그 생각의 대상이 되는 ‘세계(객체, 물질)’는 이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실체로 분리되었다. 나의 몸 또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한 대의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 즉 공간을 차지하는 ‘연장(延長)된 것(res extensa)’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이성의 성채 안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에게, 아니 이 차가운 논리에 매혹되려는 우리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말로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단지 ‘뇌의 전기 신호가 만들어낸 착각’이라고 정의할 것인가? 아이의 터질 듯한 울음소리를 그저 고장 난 ‘기계의 소음’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코기토는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을 주었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사랑하고 감응해야 할 대상을 모두 지워버렸다. 우리는 비로소 확실한 존재가 되었지만,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훗날 20세기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그는 정신과 물질이 갈라진 세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배를 조종하는 선장’의 도식에 속아 넘어가는지를 지적했다. 우리는 은연중에 자신을 육체라는 배를 저 멀리서 냉철하게 조종하는 선장(정신)처럼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이 공허한 상상을 깨뜨리며, 나는 내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곧 ‘몸’이라는 명백한 진실을 우리 앞에 되돌려 놓는다. 배가 파선되면 선장은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육체가 부서지면 영혼도 사라진다. 우리는 몸이라는 배에 ‘탑승’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가 곧 ‘나’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데카르트 자신조차 이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내 몸 안에, 선장이 배 안에 있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밀접히 결합되어 거의 뒤섞여 하나를 이룬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역사는 그의 이 섬세한 단서 조항 대신, 그가 세운 강력한 분리의 성채만을 기억했다. 그렇게 근대는 몸을 잃어버린 채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철학사에서 ‘심신 이원론(Mind-Body Dualism)’이라 불리는, 근대 세계 전체를 탄생시킨 가장 강력하고도 위험한 아이디어다. ‘나’의 본질은 육체가 아닌 정신이며,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될 수 있고 서로 다른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믿음. 이 믿음 위에서 근대의 모든 것이 새롭게 세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