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 차가운 논리의 신

제2부: 거대한 분리: 이성의 왕좌, 감응의 추방

by 한재영

제5장 기술과 알고리즘: 사고는 복제될 수 있는가


1절. 앨런 튜링, 차가운 논리의 신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생각하는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그의 사후 거의 300년 동안 철학자들의 머릿속을 맴도는 매혹적이면서도 동시에 풀리지 않는 유령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언제나 “기계가 ‘정말로’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증명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의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기계가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기계가 우리와 같은 주관적인 의식을 경험할 수 있는가? 기계가 진정한 의미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끝없는 논쟁과 사변만을 낳을 뿐,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제자리를 맴돌며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지루하고 생산성 없는 교착 상태를 결정적으로 깨뜨린 사람은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20세기 중반,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과 맨체스터 대학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내성적이면서도 비범하고 때로는 괴짜처럼 보였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 앨런 튜링이었다.

튜링은 케임브리지의 고상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유별난 기인(奇人)이었다. 그는 자전거를 탈 때 꽃가루 알레르기를 막겠다며 군용 방독면을 쓰고 질주하여 마을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머그컵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 연구실 라디에이터에 쇠사슬로 묶어놓기도 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그의 ‘달리기 실력’이었다. 그는 올림픽 국가대표 상비군 수준의 기량을 가진 마라토너였다. 그 이유는 아마 그가 머리가 복잡할 때면 늘 아무도 없는 들판을 미친 듯이 달렸던 고독한 습관 덕분이었을 것이다. 훗날 그는 “내 몸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부분은 다리뿐”이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그의 강인한 육체, 그러나 그 육체 안에 갇혀버린 비범하고 고독한 정신. 그는 땀에 흠뻑 젖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 불완전하고 시끄러운 육체를 벗어난 순수한 논리의 세계, 지치지 않는 완벽한 기계의 세계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튜링의 이러한 유별남이 가져올 혁명적인 발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최악의 비극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는 전쟁 당시 영국 정부의 극비 암호해독 센터였던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서, 나치 독일군이 사용하던 철옹성 같은 암호 생성기 ‘에니그마(Enigma)’를 해독하는 핵심적인 임무를 맡았다. 매일매일 바뀌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가능한 조합 속에서 단 하나의 의미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야 하는 이 지옥 같은 작업 속에서, 그는 인간의 직관이나 영감만으로는 이 거대한 정보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직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빠르고 정확하며 지치지 않는 ’계산(computation)’만이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는 이 계산을 수행하기 위한 최초의 거대한 전자 기계식 계산 장치, ‘봄브(Bombe)’를 설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이 기계는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튜링이 평생을 바쳐 ‘육체 없는 지성’에 그토록 천착했던 이유는 단순히 전쟁의 경험이나 수학적인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차가운 논리의 이면에는 소년 시절 겪었던 가슴 시린 상실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괴짜 취급을 받던 외톨이 튜링에게, 한 학년 선배였던 ‘크리스토퍼 모콤’은 유일한 친구이자 지적 동반자, 그리고 튜링이 평생 가슴에 품었던 첫사랑이었다. 두 천재 소년은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복잡한 수학 공식을 풀고, 밤하늘의 별을 관측하며 서로의 영혼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0년, 크리스토퍼는 소 결핵(bovine tuberculosis)으로 인해 열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존재의 허무한 소멸 앞에서, 튜링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는 크리스토퍼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묻는다.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정신은 육체를 떠나 어딘가에, 다른 형태로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튜링에게 ‘생각하는 기계’란, 너무 일찍 떠나버린 친구의 영혼을 다시 불러오거나, 혹은 썩어 없어질 육체 대신 영원히 고장 나지 않는 그릇에 정신을 담고 싶었던 슬픈 소망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인공지능은 단순한 계산 도구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의 가능성이었다.

이 간절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이미 전쟁 전인 1936년에 모든 혁명의 설계도를 머릿속에서 완성해 두었다. 그는 ‘보편 튜링 기계(Universal Turing Machine)’라는 상상의 기계를 제안했다. 이 기계는 무한히 긴 종이 테이프와 그 위에 0과 1을 쓰고 지울 수 있는 헤드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수학적 증명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품인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탄생 선언이었다. 기계 자체(하드웨어)를 바꾸지 않고도, 테이프에 적힌 명령(소프트웨어)만 바꾸면 계산기에서 타자기로, 타자기에서 체스 기계로 변신할 수 있는 만능 기계. 튜링은 인간의 뇌 역시 이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고도의 생체 기계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전쟁이 끝나고 개인적인 상실의 아픔을 이론적 확신으로 승화시킨 후, 그는 마침내 1950년 철학 저널 <마인드(Mind)>에 발표한 기념비적인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생각’이라는 모호하고 신비로운 개념을 마치 외과 의사가 환부를 다루듯 냉정하게 수술대 위에 올렸다.

그는 과감하게, 생각의 ’내면(inner world)’을 들여다보는 것을 포기하자고 제안했다. 한 인간이 ‘생각’할 때 그의 머릿속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가 정말로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지는 우리 외부 관찰자가 결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만이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완전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 당신은 내가 정말로 심장이 뛰고 뺨이 붉어지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지, 아니면 단지 당신을 속이거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 단어를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결코 100%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가 외부로 드러내는 ’행동(behavior)’뿐이다. 그의 말, 그의 표정, 그의 반응. 이 급진적인 행동주의적 통찰을 바탕으로, 튜링은 자신의 유명한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 즉 오늘날 ’튜링 테스트(Turing Test)’라고 불리는 사고 실험을 제안한다.

상황은 이렇다. 심판관인 당신은 어떤 방에 혼자 앉아 있다. 당신 앞에는 두 개의 타자기(혹은 컴퓨터 단말기)가 놓여 있고, 각각은 벽 너머 서로 다른 방에 있는 누군가와 문자로만 연결되어 있다. 한쪽 방에는 남자가, 다른 쪽 방에는 여자가 들어가 있다. 당신의 목표는 제한된 시간(예: 5분) 동안 자유롭게 타자기로 양쪽과 대화를 나눈 뒤, 어느 쪽이 남자이고 어느 쪽이 여자인지 정확히 알아맞히는 것이다. 이때, 남자의 목표는 당신을 속여 자신이 여자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고(즉, 여자인 척 흉내 내는 것), 여자의 목표는 당신을 도와 자신이 정말 여자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게임의 1단계다.

이제 튜링은 이 게임의 핵심적인 비틀기, 즉 진짜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남자가 있던 방에 ’기계’를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 당신은 한쪽 방의 인간(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과 다른 쪽 방의 기계와 문자로만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당신이 제한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뒤, 누가 기계이고 누가 인간인지 합리적인 확률 이상으로 구별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게임의 규칙 속에는 섬뜩할 정도로 명확하고 혁명적인 철학적 선언이 담겨 있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 이상 영혼의 신비로운 작용이나 세상과의 깊은 ’감응’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로 드러나는 ’성능(performance)’이며, 측정 가능한 ’결괏값(output)’이다. 어떤 기계가 사랑에 대해 셰익스피어처럼 아름다운 소네트를 쓸 수 있다면, 그 기계가 정말로 사랑이라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는지는 중요하지도 않고, 우리가 알 수도 없다. 그저 인간처럼 사랑을 그럴듯하게 ’표현’하고, 우리를 성공적으로 ‘속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지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면의 진정성이나 깊이는 증명할 수 없으니,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고 객관적인 기준은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과 성능뿐이라는 극단적인 선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데카르트가 시작했던 정신과 육체의 분리가, 300년의 시간을 거쳐 도달한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육체와 감응이 제거된 순수한 ‘정신’의 활동은, 이제 그것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는 기계의 기호 조작 능력과 외형적으로는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튜링은 ‘생각’이라는 신비롭고 형이상학적인 유령을, ‘성공적인 모방’이라는 측정 가능하고 공학적인 기계로 바꾸어 놓았다.

튜링의 이 대담한 제안은 당시 철학계와 막 태동하던 컴퓨터 과학계에 거대한 파문을 던졌다. 많은 철학자들이 분노했다. 어떻게 차가운 계산 기계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담긴 인간적인 고뇌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0과 1의 나열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튜링의 테스트가 ‘생각’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 즉 ‘의식(consciousness)’과 ‘이해(understanding)’, ‘감정(emotion)’을 완전히 무시하고, 껍데기뿐인 모방 능력만을 평가하는 피상적인 기준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튜링의 대답은 언제나 냉정하고 일관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이 정말로 무언가를 느끼고 이해하는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우리는 타인의 머릿속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그의 말과 행동, 그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그의 내면 상태를 ‘추측’하고 ‘해석’할 뿐이다. 만약 어떤 기계가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면, 우리가 유독 그 기계에게만 ‘아니, 너는 생각하지 않아. 너는 단지 흉내 낼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種)에 속해 있다는 생물학적 우월감이나 오만한 편견이 아닐까?

튜링의 이 냉철하고 강력한 논리는 ‘생각’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수천 년간의 신비주의적인 장막을 걷어내고, 인공지능 연구라는 구체적이고 야심 찬 공학적 프로젝트의 길을 활짝 열었다. 이제 목표는 명확해졌다. 영혼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성공적으로 ’모방’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지적 성취의 이면에는, 튜링 자신의 깊고 어두운 비극이 숨어 있었다. 그는 ‘생각’을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으로 정의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가장 깊고 본질적인 내면의 일부, 즉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외부로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는 편협하고 잔인한 사회에 살고 있었다. 1952년, 그는 동성애 행위가 중범죄였던 영국에서 ‘중대한 외설 행위(gross indecency)’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감옥에 가는 대신,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는 화학적 거세를 받아들이는 끔찍한 굴욕을 견뎌야 했다. 인간과 기계의 구별을 지워버리고자 감응을 배제한 냉철한 테스트를 고안했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사회로부터는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 짓는 야만적이고 비논리적인 테스트를 당하면서 자신의 감응마저 강제로 거세당하고 있었다. 그의 위대한 지성은 전쟁에서 조국을 구했지만, 그의 내밀하고 진실한 감응은 조국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고 파괴되었다.

결국 2년 뒤인 1954년, 그는 청산가리에 절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입 베어 문 사과는, 마치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지식의 정점에 도달했던 한 비범한 인간이 결국 자신의 감응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깊은 비극을 상징하는 듯했다.

튜링의 짧고 강렬했던 삶과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열어젖힌 새로운 시대의 근본적인 모순과 위험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생각’을 외부의 성능으로만 판단하고 내면의 진실을 무시하는 세계는 강력하고 효율적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감응’의 중요성을 보지 못할 때 얼마나 잔인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

튜링이 던진 질문,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는 이제 “기계가 우리를 성공적으로 속일 수 있는가?”라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류는 생각의 또 다른 본질, 즉 생각의 재료이자 연료인 ‘정보(information)’ 그 자체를 해부하고 그 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생각의 ‘행동’이 모방 가능하다면, 생각의 ‘재료’인 정보 또한 분해하고, 측정하고, 복제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놀라운 답을 내놓은 사람은 대서양 건너편, 미국 벨 연구소의 또 다른 고독한 천재, 클로드 섀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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