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거대한 분리: 이성의 왕좌, 감응의 추방
제5장 기술과 알고리즘: 사고는 복제될 수 있는가
2절. 클로드 섀넌, 의미의 장례식을 선언하다
앨런 튜링이 ‘생각’의 정의를 ‘성공적인 모방’으로 뒤바꾸며 형이상학의 안개를 걷어냈다면, 대서양 건너 미국 뉴저지의 벨 연구소(Bell Labs)에서는 또 다른 조용하고 재기 넘치는 천재 수학자가 그 생각을 움직이는 연료이자 재료, 즉 ‘정보(information)’의 본질 자체를 발가벗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클로드 섀넌이었다. 그는 튜링처럼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직접 암호를 해독하지는 않았지만, 20세기 중반 통신 기술 혁명의 심장부에서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실용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1943년 앨런 튜링이 암호 관련 업무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벨 연구소에서 섀넌과 매일 티타임을 가지며 교류했다는 점이다. 두 천재는 기밀 보안 때문에 서로의 구체적인 임무(에니그마와 X시스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인간의 사고를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눈을 반짝이며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튜링이 세상의 고통을 짊어진 비극의 주인공이었다면, 섀넌은 그 세상을 호기심 어린 놀이터로 여기는 유쾌한 어린아이였다. 그는 벨 연구소의 긴 복도를 외발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동시에 공 3개를 저글링하는 기이한 서커스를 선보이곤 했다. 동료들이 경악해서 쳐다보면 그는 마치 천진한 어린아이마냥 태연하게 웃으며 지나갔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문제—그것이 복잡한 통신 이론이든, 저글링의 물리학이든—는 고뇌의 대상이 아니라, 분해하고 조립하며 즐기는 지적인 퍼즐 게임일 뿐이었다.
그의 이런 장난기 넘치는 천재성은 그가 만든 기괴한 발명품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틈만 나면 연구실에서 이상한 장난감을 만들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최종 기계(The Ultimate Machine)’라고 불리는 작은 상자였다. 이 기계의 작동 원리는 서늘할 정도로 단순했다. 사용자가 상자에 달린 스위치를 ‘ON’으로 켜면, 상자 뚜껑이 열리면서 기계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손은 스위치를 도로 ‘OFF’로 꺼버리고는 다시 상자 속으로 사라진다. 그게 전부였다.
오직 자신을 끄기 위해 존재하는 기계. 어떤 생산적인 목적도, 의미도 없이 오직 ‘작동’ 그 자체만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사라지는 이 허무한 기계는, 섀넌이 바라본 정보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일종의 철학적 우화와도 같았다. 의미는 없어도 기능은 완벽할 수 있다. 이것은 다가올 디지털 시대가 보여줄 텅 빈 효율성을 예언하는 듯했다.
또한 그는 ‘테세우스(Theseus)’라는 이름의 기계 생쥐를 만들어 미로 찾기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 작은 자석 쥐는 처음에는 미로 속을 이리저리 부딪치며 헤매지만, 한 번 출구를 찾고 나면 그 경로를 ‘기억(정보화)’했다. 그리고 다시 미로에 놓으면, 이번에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최적의 경로로 출구를 찾아 질주했다. 뇌도 없고 생명도 없는, 심지어 현대적인 반도체 칩 하나 없이 그저 전화 교환기에서 뜯어낸 수십 개의 투박한 릴레이 스위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인 이 기계 덩어리가 말이다. 쥐가 미로를 탐색하며 결정을 내릴 때마다 ‘철컥, 철컥’ 하고 요란하게 울리던 금속 스위치들의 마찰음은, 기계가 과거의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학습’을 해내고 있음을 알리는 마치 생생한 사유의 소리처럼 들렸다. 이것은 생명체의 지능조차도 결국 정보의 축적과 처리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시연이었다.
이처럼 세상을 '의미'가 아닌 '기능'과 '구조'로 바라보는 섀넌의 독특한 시선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급진적이고도 동시에 섬뜩하기까지 한 놀라운 추상화로 이어졌다. 그는 당시 통신 공학의 난제였던 잡음(noise)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시지의 ‘내용(content)’이나 ‘의미(meaning)’를 과감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수학적 분석에서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아니었다. 그것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긴급한 군사 명령이든, 연인에게 보내는 절절한 사랑 고백이든, 다음 주 날씨를 알리는 일기예보든, 시시콜콜한 안부 인사든, 섀넌의 수학적 이론 안에서는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그 메시지가 수신자가 가지고 있던 ‘불확실성(uncertainty)’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줄여주는가였다. 이것이 그가 1948년에 발표하여 세상을 바꾼 기념비적인 논문, “통신의 수학적 이론(A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의 혁명적인 핵심이다.
섀넌은 ‘정보량(amount of information)’을,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불확실한 상태와 그 사건의 결과를 알게 된 후의 확실한 상태 사이의 ‘불확실성이 줄어든 정도(또는 놀라움의 정도)’로 정의했다. 예를 들어, 동전 던지기 게임을 할 때 던지기 전에는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정확히 반반, 즉 50대 50으로 불확실하다. 하지만 동전을 던진 뒤 “앞면이 나왔다”는 메시지를 받으면, 그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때 “앞면이 나왔다”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달한 정보량은 바로 그 사라진 불확실성의 양과 정확히 같다는 것이다. 섀넌은 이 정보량의 가장 기본적인 최소 단위를 ‘비트(bit)’라고 불렀다. Binary digit의 줄임말인 비트는, 동전 던지기의 결과처럼 정확히 두 가지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를 확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량, 즉 ‘0’ 또는 ‘1’이라는 가장 단순한 이진법 신호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해 보이는 정의 속에, 사실은 인류의 세계관 전체를 뒤흔들 엄청난 혁명이 숨어 있었다. 섀넌은 이 ‘비트’라는 개념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복잡하고 다채로운 정보—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긴급 암호문, 연인에게 보내는 수백 편의 열정적인 사랑의 시, 베토벤의 장엄한 교향곡 9번 악보 전체, 1장의 사냥꾼이 눈보라 속에서 느꼈던 처절한 고통과 희망의 기억까지도—결국에는 원리적으로 ‘0’과 ‘1’이라는 두 개의 단순한 기호, 즉 ‘비트’의 유한한 나열로 완벽하게 표현되고, 측정되고, 전송될 수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이것은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차갑고 서늘하며 동시에 강력한 발견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미의 장례식이었다. 1장의 사냥꾼이 느꼈던 살을 에는 고통의 생생한 질감, 2장의 부족들이 동굴 벽에 힘들게 새겨 넣었던 조상신에 대한 뜨거운 경외감, 3장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고라 광장에서 목숨을 걸고 탐구했던 ‘정의’와 ‘선’의 무게감. 그 모든 풍부하고 다층적이며 결코 단순화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의미와 ‘감응’의 고유한 질감은 이제, ‘0100100001001001…’ 같은, 아무런 질감도 온도도 깊이도 없는 차갑고 평평하며 무한히 복제 가능한 디지털 신호의 나열로 완벽하게 번역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해”라는 말과 “죽여줘”라는 말은, 인간적인 의미의 차원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지만, 섀넌의 관점에서는 단지 '0'과 '1'의 배열이 조금 다른, 동일한 크기의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했다.
데카르트가 정신에서 육체를 분리하여 순수한 사유의 유령을 탄생시켰다면, 섀넌은 그 유령이 사용하는 언어, 즉 정보에서 의미와 맥락을 분리하여 순수한 데이터의 시대를 열었다. 사고의 핵심은 그 내용이나 진실성, 혹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구조(structure)’이며, 그 구조는 얼마든지 측정 가능하고, 복제 가능하며, 압축 가능하고, 오류 없이 전송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탄생한 것이다. 의미는 시끄럽고, 모호하며, 주관적이고, 무엇보다 통신 공학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효율적인 불순물일 뿐이었다.
섀넌의 정보 이론은 공학적인 측면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디지털 통신 기술은 폭발적으로 발전했고,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잡음 없는 깨끗한 전화 통화를 하고, 고화질의 영화를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하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순식간에 사진과 동영상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현대 정보 시대의 숨겨진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가 열어젖힌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인류가 아직 그 대가를 온전히 다 치르지 못한 위험하고 불안한 선물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미 없는 정보’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심지어 의미 있는 정보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불길한 가능성이었다. 섀넌의 이론 속에서 정보는 ‘참(truth)’이나 ‘거짓(falsehood)’을 본질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정보량은 오직 예측 불가능성(놀라움)에 비례할 뿐, 그 내용의 진위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쉽게 말해 이런 것이다. 정보의 양을 이해하는 데는 우리가 어린 시절 즐겨 하던 ‘스무고개’ 놀이가 가장 완벽한 비유가 된다. 섀넌에게 정보량이란, 어떤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던져야 하는 ‘질문의 횟수’와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내일 아침에도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이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하지만 이 답을 맞히기 위해 스무고개 질문이 필요할까? 전혀 필요 없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100%의 확률이기 때문이다. 질문이 0번 필요하니, 섀넌의 공식에서 이 메시지의 정보량은 ‘0’이다. 뻔한 이야기에는 정보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 “내일 아침에는 해가 서쪽에서 뜰 것이다”라고 외친다면 어떨까? 이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거나 기적 같은 일이다.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수많은 확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인가?”, “지구가 거꾸로 도는가?”, “관측 오류가 아닌가?” 질문이 거듭될수록, 즉 확인해야 할 불확실성이 클수록 정보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발생 확률이 희박하여 우리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신하는 자극적인 거짓말이나 가짜 뉴스는, 질문할 필요조차 없는 뻔하고 지루한 진실보다 수학적으로 더 높은 ‘정보량(놀라움)’을 가진 것으로 취급된다.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뉴스가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뉴스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주는 것과 같다. 정보 그 자체에는 내재적인 가치나 윤리가 없다는 서늘한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섀넌의 이론은 필연적으로 ‘맥락(context)’을 제거했다. 물론, 정보를 전달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그것이 말이든 글이든—는 본질적으로 현실의 생생한 맥락을 어느 정도 소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하지만 섀넌 이전까지 그것이 극복해야 할 안타까운 ‘한계’였다면, 섀넌의 이론은 이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를 통신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필수 조건’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는 "정보의 의미는 통신 공학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결과, 같은 “불이야!”라는 세 글자의 외침도, 불이 난 극장에서 공포에 질려 외쳐질 때와 친구들과 캠프파이어를 하며 장난스럽게 외쳐질 때의 엄청난 의미 차이는 완전히 소거된다. 순수한 정보 이론의 관점에서 두 메시지는 동일한 비트열로 환원될 수 있으며, 정확히 동일한 정보량을 가질 뿐이다. 이 철저한 탈맥락화는 정보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보편적으로 유통시키는 데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정보가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 책임은 전적으로 그 메시지를 받는 인간의 몫으로 남겨졌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그 의미를 해석하고 ‘정당화’하는 능력은 점점 더 희소해지는 역설적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모든 이론적, 기술적 준비는 끝났다. 튜링은 ‘생각’을 ‘성공적인 모방’으로 재정의했고, 섀넌은 그 모방의 재료이자 표현 수단인 ‘정보’를 ‘의미 없는 0과 1의 나열’로 완벽하게 환원했다. 데카르트가 300년 전에 꿈꾸었던 ‘감응 없는 순수한 사고 기계’를 만들기 위한 모든 철학적, 수학적 기초가 마침내 완성된 것이다.
데카르트가 육체로부터 분리해낸 고독한 ‘정신’이라는 유령은, 이제 튜링의 냉철한 ‘모방 게임’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섀넌의 무한한 ‘비트’라는 피를 수혈받아, 마침내 20세기 후반의 강력하고 빠른 디지털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계의 신체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준비를 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새롭게 태어난, 혹은 부활한 기계적 정신이 현실 세계의 무대 위에 등장하여, 인간의 가장 신성하고 자부심 넘치는 영역으로 여겨졌던 지성의 왕좌에 공식적으로 도전하는 일뿐이었다. 그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대결의 무대는 바로 64개의 흑백 칸으로 이루어진 체스판 위에서 펼쳐졌다.